'이 놈 어미 죽어 목 메에 우는데도 사람들은 그게 광대짓인줄 알고 웃고 또 웃더이다'
연산: 슬픔처럼 잡스러운 게 없을 게다. 그런데 길아 나는 어이해 이리 서럽기만 하냐? 아프지? 이(爾), 너도 아프지? 그렇지? 이(爾), 소리를 질러라. 살려달라고 구걸을 해봐. 소리치지 않고 그렇게 계속 웃으면, 나는 니가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짓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爾), 말해라. 니가 말하지 않으면 때리는 나는 부끄러워지지. 그래서 나는 더 세게 너를 때리게 된달 말이다. 말해봐. 아프다고, 제발 그만두라고 말해보란 말이다.
장생: (공길이 쓰고 있던 종이를 빼앗으며) 이거 대단한 양반이 되셨구만. 집어 쳐. 니가 뭐야? 니가 뭐냐니까?
공길: 나? 아무것도 아니야. 기집도 아닌 기집, 사내도 아닌 사내.
장생: 이런 이런, 꽃이 붉은들 십일을 가나?
공길: 져야 꽃이지.
장생: 그래 잘 썩었다.
공길: 혼자 나대지 좀 마.
장생: 뜨자. 이건 아니야. 장바닥에 나가 빌어먹어도 할 말은 하고 살자. 피죽을 먹어도 줏대는 있어야지.
공길: 세상은 줏대 갖고 사는 게 아니야.
공길: (옷을 벗으며) 이놈 마마를 위해 뭘 못합니까? 이놈 전하가 하라시면 한 사발 오줌이라도 들이키고, 똥자루 들어 입 속에 뭉개 넣기라도 합니다. 이놈 전하가 바라시면 기집도 마다 않고. 이놈 전하를 위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고. 이 놈 전하가 바라시면 돌을 지고 천 길 바다 속이라도 뛰어듭니다. 이놈 울라면 울고 웃으라면 웃고 맞으라면 맞고 죽으라면 죽고 벗으라면 벗지요. 주저 없이 벗지요. 거침없이 벗지요.
공길: 미천한 소인이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늘 위태하고 불리해 보이는 때가 판세를 뒤집을 절호의 찬스라는 것입니다.
공길이 나가다 다시 들어온다.
연산: 왜?
공길: 두고 간 것이 있어서.
연산: (찾으며) 뭘 두고 갔을까? 금이라도 두고 갔니?
공길: 그게 아니라 이놈 마음을 두고 가서….
장생: 아, 누가 나를 단속해? 누가 나를 부려? 하하하, 그게 글이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는 글발! 그것이 글이요. 암, 그게 진짜 글이지. 녹수는 홍가의 기집이었다가….
장생: 난 내 가슴이 벌렁거릴 때만 살아있다고 느껴. 그래서 온 거야.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살아서 웃고 떠들고, 치받고 얻어맞고. 싸고 갈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그걸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려고 온 거라고. 너를 두고 한양을 떠날 수도 있었지만 내 벌렁대는 가슴을 따라 온 것이라고.
공길 : (얼굴의 분을 지우며)
니놈은 본시 여자도 아닌 것이 여자이고
때론 앙탈도 부릴까
때론 서글퍼 꺽꺽 울기도 하고
때론 턱없이 헤헤 웃는구나
그것이로? 너는 정히 그것이로?
강봉사, 봉봉사(공길) 걸어오다 서로 부딪힌다.
...
...
둘은 서로 만나려고 하는데 엇갈린다. 엄한 데로 간다.
봉봉사 : 이봐 어디 있어? 나 여기 잇고 너 거기 있어?
강봉사 :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만나려고 하나 또 엇갈린다)
봉봉사 : 아, 나 여기 있고 너 기기 없어?
강봉사 :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없다니까.
결국 둘은 만난다.
연산: 뭐하냐, 계속하지 않고? 놀이를 멈추라 명한 적 없다. 어서 놀아라. 싫어? 그럼 내가 놀까?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없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없어? 나 여기 없고 너 거기 있어? (공길의 흉내를 내며 놀다가) 인생 한 판 놀이. 그 놀이에도 가시는 있었구나.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나를 버리느냐?
공길: 왕이여, 나 죽으면 한강수에 던져주오. 흘러가다 바람맞아 살랑살랑 춤도 추고 너울너울 재주도 넘고 흘러흘러 아주 물이 되게. 저 죽은 지도 모르게…. 왕이여, 부탁이니 나를 위해 한번만 더 웃어주오.
연산: 길아, 저 어둠 뒤에 무엇이 있길래 니가 가느냐? 이제 아무도 없구나. 이제 너도 나도 없구나. 이것이 끝이구나. 이것이 그렇게도 바라하던 끝이구나.
연산: (웃다가) 인생 한바탕 꿈! 그 꿈이 왜 이리 아프기만 한 것이냐? 자, 반겨줄 이 이제 아무도 없으니 나를 빨리 저 어둠 속으로 데려가다오. 탕진과 소진만이 나였으니 나를 어서. 한때 깜빡였던 불길이로. 바람 앞에 촛불이로. 다 탄 불길이로. 연기같이 사라질 불꽃이로. 다 탔구나! 다.
공길이 그리운 밤이다.....
오늘 밤은 희곡 '이' 로 내가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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