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수현 작가.
그런데 시청자들이 이 뻔한 통속 멜로에 열광하고 있다. 방송 첫 주부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고, 6회 방영분은 전국 17.2%, 수도권 19.7%의 시청률(AGB닐슨)을 기록했다. 20부작 중 3분의 1도 방영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빠른 상승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요 근래 볼 수 없던 명품 드라마"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여성들 사이에 뭔가를 깜빡하면 "내가 수애야"라고 말하는 식의 유행어까지 생겨났다. '김수현 작가의 힘'이 이런 신드롬을 빚어냈다는 분석이다.
①과감한 과정 생략
김수현 작가는 우선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욕망과 의무 사이에 내몰린 두 남녀에게 잠시도 쉬어갈 틈을 주지 않고 끝없이 고통을 몰아쳐 극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방송 첫회부터 두 남녀가 이별하는 것. 작가는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대신 이별 선언 후 무너지는 감정을 한 회에 걸쳐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극 곳곳에 두 남녀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가늠하게 하는 각종 대사와 회상신을 배치했다. 이런 작법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단박에 무너뜨렸다. 이후 김 작가는 여주인공 서연(수애)에게 내려진 알츠하이머 진단, 남주인공 지형(김래원)의 파혼 선언, 약혼녀(정유미)의 헛구역질 과정까지를 단숨에 전개했다.
②적나라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
뻔하디뻔한 극 중 캐릭터도 작가의 적나라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현실적인 인물로 재탄생했다. 서연의 아름다운 몸을 원하지만 자신의 풍족한 배경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남자 지형, 오랫동안 짝사랑한 지형에게 자신을 다 맞춰주면서도 자존심만큼은 지키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여자 서연은 모두 어린시절 환경과 비정상적인 연애를 통해 빚어진 어쩔 수 없는 치졸한 인물들이었다.
- ▲ 기억을 잃어가는 가난한 여자와 부잣집 남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SBS 월화극 '천일의 약속'. /SBS 제공
③리드미컬한 극적 상황 전개
알츠하이머란 불치병이 등장하는 과정도 작가는 서두르지 않았다. 서연이 가스불을 끄는 것을 깜빡 잊고 고모집에 가거나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와 고속도로에서 헤매다 지형과 싸우는 장면 등은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에피소드였다. 김 작가는 이런 과정을 리드미컬하게 일상 속에 배치했고 이것을 '알츠하이머'란 비극으로 한꺼번에 터뜨렸다.
④김수현표 명품 대사
이제는 고유명사가 된 '김수현표 대사'도 어김없이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엿 먹어라 알츠하이머" "그날부터 나는 너를 안고 싶은 욕심이 하루의 반을 차지하는 느낌이다" 등 연극적이고 문어체적인 속사포식 대사는 답답한 현실에서 말 못하고 허둥대는 일반인들에게 대리만족감을 주면서도 품격 있는 연극을 보는 듯한 감정적 강렬함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평이다.
물론 이런 특장(特長)들에 대해 불편함을 나타내는 의견도 있다. "내용이 막장이다" "길고 빠른 대사가 듣기 싫다" 등이다. 이에 대해 김수현 작가가 트위터로 "그렇게 힘이 들면 김수현 드라마를 외면하라"고 응수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비난 역시 '천일의 약속'의 화제성을 확인해 주는 방증들이라는 얘기가 많다. 드라마평론가 공희정씨는 "김수현 드라마는 한 인물이 그런 감정을 느끼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따라간다는 점에서 기존 막장 드라마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탄탄한 줄거리부터 적절한 캐스팅, 비현실적으로 완벽하게 정제된 대사는 김수현 드라마를 늘 새롭게 느껴지게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