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광복동 음악감상실 '무아'를 기억하시나요? 서울의 '세시봉'을 음악적으로 앞질렀던 전설의 공간. 당대 젊은이들의 꿈과 삶, 웃음과 슬픔이 낱낱이 깃들었던 그곳에서 DJ는 당시 최고의 우상이었다. 세월은 바람처럼 흘러 온갖 문명의 이기가 판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무아의 DJ들 중 아직도 원도심을 벗어나지 않고 음악카페를 운영하며 명맥을 잇는 두 사내가 있다. 정병호·윤주은 씨.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들로 하여금 음악을 운명처럼 부여안고 살아가게 만든 것은.
'세시봉'과 '나가수' 열풍으로 높아진 '진짜 음악'에 대한 관심. 근래 들어 우리 음악계 풍경은 변화의 조짐이 또렷하다. 이런 말이 가능하다. "1970년대 서울에 음악감상실 '세시봉'이 있었다면, 부산에는 '무아'가 있었다." '무아'는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음악적으로도 서울을 앞질렀던 '전설'이었다.
정병호
"이거 월출산에 오를 때 잡던 밧줄인데?" 이런 말이 들려오는 곳이라면 정병호(50) 씨의 음악카페 '음악에'다. 사람 북적대는 국제시장의 한쪽 모퉁이에 있는 이곳의 입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좁디좁은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오를 때 계단을 따라 왼쪽에 늘어져 있는 굵은 밧줄을 잡는 것이 좋다. 경사가 무척이나 급하니까. 약주 드신 분은 반드시 요주의!
어둑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에 들어서자 철 지난 LP 자켓들이 여기저기 벽면에 붙어서 추억을 흩날리고 있다. 간단한 무대와 기타, 낡은 스피커, 옛 뮤지션들이 나오는 TV모니터들의 조합. 1970~80년대가 어른거린다. 정 씨는 전설의 음악감상실 '무아(無我)'의 마지막 DJ였다. "무아에는 5~6명 정도의 DJ가 있었어요. 저는 별로 우수한 DJ는 아니었답니다." 이렇게 겸양을 보이는 정 씨는 1987년부터 95년까지 무아에서 DJ를 지냈다. 1970년대 초 광복동에 문을 연 무아는 당시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유일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신청곡을 듣거나 DJ의 숨은 추천 명곡들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장기자랑이나 퀴즈 코너, 그리고 일반인들이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문화의 장이었다.
LP 위로 조심스레 바늘을 올리는 정병호 씨의 섬세한 눈길이 그윽하다
고교 때부터 DJ, 음악에 미쳐 산 30년 문화명소 '무아'서 일할 때가 절정기 그 아련한 그리움 살려 카페 차려 신창동서 전통적 음악공간 명맥 유지 오 늘도 서민 애환 담고 "뮤직 큐!"
무아가 문을 닫을 때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던 정 씨는 그런 현실이 너무 아쉬워 삶과 음악을 대중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직접 차리게 됐다. '음악에'를 2001년 문 열었으니 올해로 벌써 10년째. '음악에'라는 단출한 이름에서 벌써 느낌이 팍 온다. '음악에 푹 빠진 생, 혹은 음악에 묶인 행복한 삶'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아니겠는가. LP와 CD, DVD, 장르를 불문한 음반 2천여 장이 한쪽 벽면에 빼곡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추억의 공간이라 하지만 정 씨에게는 일상이다. 버스 타고 가다가 문득 떠오른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고, 입 속에 맴도는 한 소절의 가락만 가지고 노래를 찾으러 오는 사람도 있다. 제목도, 가사도 모르지만 흥얼거리는 가락만 갖고서도 노래를 찾아낸다. 대략 60~70%는 알아내는 이가 정 씨다. 이 정도 수준이니 웬만한 음악이야 다 알 수 있다. "근데, 요즘 노래는 잘 못찾아요. 하하." 솔직하다. 잊었던 추억의 명곡들을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일, 여기서 그는 희열하고 감사한다. "심신이 편한 곳, 슬픔은 쉬어가고 기쁨은 늘여가는 곳, 그런 공간을 꿈꿉니다."
정 씨가 음악에 꽂힌 건 중2 때였다. 레코드 가게에서 들려오는 밀바의 '비련' 중 후렴에 빨려든 뒤 그의 삶은 전형적인 '팝 키드'의 것이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당시 5천 원 하던 야외전축을 덜컥 구입했고, 그것을 들고 친구들과 해운대 백사장, 성지곡 수원지를 드나들었다. 중3 때는 서울 이모집 간다며 집을 나온 뒤 남포동의 다방에 취직까지 했고, 거기서 음악을 들려주는 일을 배워 고2 때 DJ 일을 본격 시작했다. 옛 미화당백화점 옥상, '목촌' '하늘소' 같은 음악다방을 전전하던 그가 87년 마침내 입성한 곳이 무아다. 이런 이력들이 그의 가슴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이다. 그는 남포동 시대를 접고 부산대 앞으로 옮겨갔을 때의 6개월을 무아와 함께한 마지막 DJ가 되었다.
그는 술 한 잔 들어가면 옛 기억을 되살려 여기 '음악에'에서 DJ식 멘트를 한 번씩 살짝 날리곤 한다. "분위기 보고 양념 삼아 애드리브를 쳐보는데 성공하면 기분 좋고, 아니면 썰렁하고 그래요." 뭐, 자주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간이무대와 마이크, 기타가 구비돼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여기서 노래도 할 수도 있다. 고객층은 30~40대가 주류지만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국악을 들으러 오는 어르신, 산을 타는 산행대장, 직장인, 시인·소설가 같은 문화인들 등등.
고객들 중에는 아직도 카세트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해 달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정 씨 역시 테이프라는 녹음방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에 기분 좋게 응하고 있다. "테이프 음악은 줄곧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가령 두 장의 LP에 실린 노래들도 연속해서 녹음해 들을 수 있죠. 이렇게 그저 흐르는 게 좋아요. 평화로움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는 이런 아날로그 방식이 참 좋아요."
최근 '세시봉'과 '나가수' 열풍에 대한 속내가 이어진다. 우선 진짜 음악이 관심받는 건 반가운 일이라는 것. 그런데 그는 여기에 좀 더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꾸려갔으면 하는 바람을 보탠다. "음악감상실이 사라지면서 음악에 대한 리퀘스트가 없어졌다는 것, 참 아쉬운 대목"이란다. 그저 흐르는 음악만 받아 듣는 수동적인 음악감상은 각박하고 바빠진 사회의 반영일 테다. 그는 그것이 안타깝다. 음악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고, 서로 서로 뭔가를 주고받으며 나눌 수 있는, 더 능동적인 방식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것이다.
'붕어'라는 별명처럼 유독 정이 많아 보이는 눈자위가 특히 인상적이다. 정이 많은 정 씨는 인간적인 대화를 손님들과 많이 나누는 편. 돈이 없어도 그저 다음에 달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 집안이나 가정에 별로 도움이 못됐다. 그게 가장 아프다. 그러나 그는 천생 음악지기다. "사람은 태생부터 음악과 뗄 수 없었어요. 자궁 속에서부터 음악과 만나지 않습니까.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내 의무이고 존재이유라고 생각해요. 나이 들어도 여력이 되는 한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겁니다."
DJ라 쓰고 '전설'이라 부른다
이 공간에서 DJ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유일하게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며 음악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데 눈 돌리지 못한 채 여전히 음악을 껴안으며 살고 있는 까닭? 원도심을 지키는 50대 연륜의 두 음악지기, 정병호(50) 씨와 윤주은(51)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멈출 수 없는 운명." "음악은 목숨과 같은 것."
윤주은
'음악에'에서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꼬맹이 무아'가 있다. 그 이름으로 보아 그 옛날 '무아'와 관련이 있다는 짐작이 들 수밖에 없다. 이곳의 사장은 윤주은 씨. 그 역시 옛날 '무아'에서 DJ로 10년을 지낸 인물이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꼬맹이 무아'는 거기서 나온 이름일 텐데, 옛 무아가 120여 평 크기의 대규모였다면 지금 이곳은 10평을 조금 넘기는 아담한 음악카페다. 그래서 '꼬맹이'다. 바로 옆 건물 1층에서 운영하다가 최근 이곳 2층으로 옮겨 새단장을 했다. 창밖으로 맞은편 원음방송 방송국이 보인다.
"무아가 문을 닫자 갑자기 직장이 사라져 버렸어요. 여긴 호구지책으로 마련한 공간이에요." 윤 씨의 말에는 음악 말고는 별달리 다른 일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어떤 회한 같은 게 묻어난다. 이곳을 찾는 이들도 이와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전설의 공간 무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간판을 보고 "아! 무아다!"라는 감탄사와 함께 이곳을 찾아들곤 한다. 그때의 DJ를 알아보고는 감격스러워하면서. "나이 들어 다른 일 할 게 없어서 평생의 벗인 음악을 업으로 삼은 거지요. 장사가 썩 잘되는 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게 제일 뿌듯합니다."
윤주은 씨가 매만지는 LP 자켓은 세월의 손때가 빚은 아름다움이다.
'무아' 문닫자 평생 벗 음악 업으로 항구도시 부산 새 외국음반 넘쳐 70년대 무아, 서울 세시봉 앞질러 음악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다양한 장르 소장 음반 5천여 장
그는 고등학생 때 선배가 DJ로 일하는 다방에 놀러다니곤 했는데 우연히 무아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는 한 DJ의 코너를 보고 반해버렸다. 그 뒤 선배의 음악다방에서 DJ로 일하게 됐고 군 제대 후 여러 곳에서 3년 정도씩 DJ 일을 했다. 무아 아래층에는 수다방이라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열리는 DJ 오디션에서 합격한 뒤 다시 무아로 옮기게 됐다. 수다방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인기를 끌면 무아로 캐스팅됐고, 무아에서 인정받은 뒤에는 방송국으로 진출하던 시절이었다.
역시 전성기는 무아에서 일할 때였다고 윤 씨는 말한다. 그가 기억하는 무아는 "부산이 자랑하는 문화의 명소"다. 1970년 초 문을 열어 25년 동안 계속됐던 무아는 당시 서울의 젊은이들이 부산에 오면 반드시 거치는 여행 필수 코스였다. 서울에 비해 음악적으로 훨씬 앞선 곳이 부산이었다. 항구를 드나드는 뱃사람들이 새로운 외국 음반을 잔뜩 부려놓았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DJ들이나 여러 통로를 통해 이런저런 음반의 구입을 부탁받기도 했다. 부산은 음악의 용광로였다.
그 역시 무아의 마지막 DJ였다. 그의 회고가 이어진다. "극장식 홀에 들어가면 요구르트 하나씩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하루 종일 지내도 누구도 탓하지 않았어요. 자판기가 10원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거기서는 담배는 물론 대화도 금지됐어요. 원칙적으로 고등학생의 출입도 금지됐지만 이렇게 건전하고 훌륭한 문화명소에 학생들이 안 올 리 있나요." 그는 처음에 입장료가 700원이었던 것이 DJ를 그만둘 시대에는 3천500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서 배출된 부산 출신 연예인도 다수 지켜봤다는 게 윤 씨의 증언이다. '도시의 그림자'나 '칸'의 멤버들이 대학가요제에 입상해서 무아에서 축하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무아라는 공간이 제공했던 '프리 스테이지'나 일요스페셜, 노래자랑 이벤트 등을 통해 부산의 젊은이들은 중앙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경험을 쌓았던 것이다. 영화홍보도 여기서 이뤄졌다. 영화의 새음반이 음악으로 소개되고 무대에서 직접 노래로 불리기도 할 정도. 그러니 무아는 남자가 여자를 사귀면 꼭 데려와서 문화적 수준을 과시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복합문화공간이었던 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요? 한 아이의 엄마가 딸을 데려와서 연애시절 아빠와 사귀며 데이트하는 공간으로 소개해주던 장면이 지금 인상적으로 떠오르네요. 무아에서는 점심 때 도장 찍고 나가서 밥먹고 다시 들어오곤 하던 학생들도 많았지요." 무아는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 오후 10시 30분에 닫았다. 클래식, 팝·록 등 각종 장르에서 여러 DJ들이 예컨대 '다시 듣고 싶은 프로그레시브음악'처럼 저마다의 독자적인 타이틀을 내걸고 음악을 들려주었다.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음악을 찾는 마니아들이 주로 많이 몰렸다.
연주자로서 꿈은 없었을까. 윤 씨는 이런 말을 한다. "제가 통기타를 치기도 하지만, 사실 옛날 그때는 DJ가 우상이었던 시절이었어요. DJ가 선곡권을 갖고 가수와 음악을 소개했으니 연주인들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겁니다. 굳이 연주자로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거에요."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당시 집에 불이 나 보관하고 있던 음악관련 서적, 무아 관련 자료들과 사진, 그리고 무수한 시집과 소설책들이 한 줌 재로 변해 버린 것. 그래도 음악카페 안쪽 벽 전면에는 무수한 CD와 LP가 시원하게 꽂혀 있다. 소장 음반은 총 5천여 장. 서정적인 통기타 음악을 좋아하다가 딥퍼플이나 레드제플린 같은 하드록 밴드를 접하면서 웅장한 감동의 음악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 들었다는 윤 씨는 그러나 음악의 특정 장르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음악에 편견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무작정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음악은 음악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생활이 됐으면 합니다. 음악을 통해서 삶이 윤택해질 수 있어요. 틀에 박힌 삶을 사는 사람들과 다른 삶 말입니다. 저 한텐 음악이 뭐냐고요? 목숨 같은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