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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상스 Jouissance 绝爽

두런두런 이야기/진담 혹은 농담

by 레제드라마 2018. 9. 1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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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상스 Jouissance 绝爽

오이디푸스가 죽고 안티고네가 테베로 돌아온 후, 두 오빠는 왕위 계승을 놓고 싸우다 죽는다. 그래서 왕이 된 외삼촌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만 허락하고 폴리네케스의 장례는 금지한다.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위반하고 장례를 치르다가 감옥에 갇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녀의 연인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도 자결한다. 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자결한다. 이처럼 안티고네가 왕명(王命)을 거역한 결과는 비극적 죽음이었다. 여기서 왕의 명령은 법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며 죽은 자에 대한 경배는 신성성으로 상징되는 신의 이름이다.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이름인 법을 거부하는 것은 저항과 전복의 숨은 열망 때문이다. 이것을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명명한다. 라캉의 주이상스는 일반적인 쾌락이 아니라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를 넘어서고 언어상징도 넘어서는 전복(顚覆)의 충동이다. 향유, 향락, 희열의 의미를 포함하는 주이상스는 강렬한 쾌락이고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그런데 무의식에 잠재한 주이상스는 법과 제도를 파괴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금기를 깨고 싶어한다. 여기서 주체분열이 생긴다. 즉, 말하는 요구와 원하는 욕망이 다르고 ‘나는 거짓말을 한다.’에서처럼 말의 주어와 행동의 주어가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 그런데도 주체는 이 분열로 인하여 생긴 결핍을 충족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위험하면서도 불온하게 아버지의 이름이자 대타자[big Other]인 법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잉여 주이상스가 있다. 사회의 법과 질서 속에서 허락되는 정도를 넘어서는 잉여 주이상스는 주이상스 그 자체가 목표이다. 과잉된 힘이기 때문에 분출될 수밖에 없고 전복의 주이상스가 분출하면, 안티고네에서 보듯이, 아버지라는 이름의 법을 파괴한다. 이것은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의 역설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지나친 쾌락은 쾌락이 아니라 불쾌와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원래 모든 주체는 상징기호를 얻기 위하여 거세당한 존재이고 그래서 소외와 결핍이 생긴다. 이때 대타자로 등록하면서 내면에 숨겨둔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주이상스의 원천이다. 이 충동적 주이상스가 언어의 사슬[상징기표, 법]을 끊고 강렬한 파괴의 힘으로 작동하면 실재계에 도달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인간은 타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자기 내면의 소타자를 억제하고 산다. 하지만 기호이고 상징이고 법인 대타자에 대해서는 복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잉여 주이상스가 없다면 대타자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소타자와의 관계를 적당하게 조절하면서 현실의 쾌락원칙에 맞추어 사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대하여 라캉은 세미나 <정신분석학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 – 1960)>에서 쾌락원리는 쾌락을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 내면에는 그것을 깨트리려는 충동 즉 주이상스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쾌락원리를 넘어서는 순간 주체가 감당을 못하고 파괴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충동적이고 성적 쾌락원리인 주이상스는 죽음의 타나토스(tanatos)로 변화한다.
주이상스는 남근주의적이지만 생물학적 남녀나 사회적 젠더와 다른 정신적 남녀로 구분된다. 그런데 사회질서를 인정하는 남성적이고 순응적인 주이상스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거부하는 여성적이고 보조적인 주이상스는 대타자를 전복하는 주이상스의 핵이다. 이 지점에서 생물학적 성을 넘어서 여러 형태의 성도착(Polymorphous pervert)이 일어나며 잉여 주이상스가 지나치게 강렬하게 작동하면 결국 파괴와 죽음에 이른다. 앞에서 예를 든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이름, 법과 제도, 상징기호, 상징질서, 언어의 사슬을 파괴하고 감옥에 갇힌 것은 저항이고 전복이며 주이상스의 욕망윤리에 따른 결과다. 지젝(S. Zizek, 1949 - )은 이런 라캉의 이론을 빌어 혁명적인 주체를 상정했는데, 그 혁명적 주체는 보편적 쾌락원리를 넘어서서 대담하고도 과감하게 대타자에게 도전하는 힘이다.
- 끝 - (충북대교수 김승환)
인문천문 목요학습 244 Thursday Study 星期四学习 2012년 7월 5일(목)
*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참고문헌
*참조 <거울단계>, <상징적 거세>, <실재의 사막>, <욕망기계>, <죽음충동>, <쾌락주의의 역설>, <타자>, <대타자·소타자>


                 출처 : http://cafe.daum.net/gounmunhak/FaUF/546?q=%EC%A3%BC%EC%9D%B4%EC%83%81%EC%8A%A4








실재계와 주이상스

 

 

1.실재계란?


실재계(the Real)는 사회적, 상징적 우주와 지속적인 긴장관계를 가지며 그 극한에 존재하는 미지의 것으로 우리 사회현실(상징계)의 기반이 되며 동시에 그 현실을 훼손시킨다. 실재계는 환상, 사물(Ding), 대상a, 그리고 주이상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상징화되기 이전의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체란 주체의 원초적 현실로서 주체에 대해 내부적이면서 동시에 상징계적 질서가 기입되고 외부와 소통하는 타자적인 질서이기도 하다. 육체는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해 주체의 토대로 상징화되면서도 자신 속에 배제된 부분을 남긴다. 배제된 것 혹은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 이때 실재는 환각적 형태로 상징계에 침투한다.

허기를 일으키는 욕구, 실재계는 욕구가 발생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상징화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전-상징계적이다. 실재계는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욕구의 형태로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 침입하는, 억압되어 있고 무의식적으로 기능하는 그 무엇이다. 실재계는 일종의 편재하는 미분화된 덩어리로서 우리는 상징화 과정을 통하여 이로부터 우리 자신을 주체로서 구분해 내야 한다. 존재란 사고와 언어의 산물이며 실재계는 언어에 선행하므로 실재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계는 외상(trauma) 개념과 연관된다.

정신적 외상은 주체가 외부자극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통제하는 데 무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대면했을 때 일어난다. 가장 일반적인 예로 주체가 너무 일찍 성에 대면하여 전개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때이다. 아이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실제적으로 또는 상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경우다. 외상 개념은 의미화 과정에 어떤 교착상태나 고착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외상은 상징화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주체를 초기 발달 단계에 고착시킨다. 외상의 경험은 실재계라는 것이 상상계 또는 사회현실 내부로 결코 완전히 흡수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언어를 통해 변형될 수 없는 잔여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라캉이 X라고 부르는 이 초과분이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는 죽음 충동 및 주이상스와 연계된다. 실재에 도달하는 것은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죽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재는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기표적 질서에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상징화를 요구함으로써 상징계의 지배력에 균열을 가져온다. 쾌락원리를 벗어나면서도 그것에 대해 간섭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징계의 틈을 뚫고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상징계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상징화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을 사유로부터 배제할 수밖에 없다. 이 여분은 주체에게 불안의 효과로 작용한다. 주체는 상징계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실재계를 죽음의 효과로 경험한다.

 

언어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욕망을 끌어당기는 원인이 된다. 주체는 언어의 세계에 진입하면서부터 사물에 대힌 직접적 접촉을 박탈당한다. 이러한 상실은 실재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주이상스의 원인이다. 실재계가 잃어버린 대상의 모습으로 주체에 다가오는 것을 사물(Ding)[1]이라 한다. 대상을 사물의 지위에 고양시키는 작업을 승화라 한다. 이 때 사물은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다. 승화란 경험적 대상의 파괴와 새로운 창조를 낳으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예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예술의 기저에는 승화를 통해 대상들을 사물의 지위까지 끌어올려 보려는 창조적 파괴와 죽음 충동이 깔려 있다.

 

2. 환상과 욕망


무의식적 욕망들은 환상을 통하여 나타나며, 방어기제(defensive processes)에 의해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환상은 현실과 상상이라는 두 극 사이에 존재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요소들의 혼합물이다. 환상의 기원은 자가성애(auto-eroticism)와 충동의 환각적(illucinatory) 충족이다. 실재 대상이 부재할 때 유아는 근원적인 만족의 경험을 환각적인 형태로 재생한다. 우리는 환상을 통해 어떻게 욕망하는가를 배우며 욕망하는 주체[2]로 구성된다.

환상의 공간은 욕망들을 영사하기 위한 일종의 스크린 같은 것이다[3]. 환상은 욕망의 무대화, 즉 욕망의 미장센(mise-en-scene)이다. 환상에서 얻는 쾌락은 목적의 달성이나 대상의 성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무대화로부터 주어진다. 환상은 결코 현실에 의해 충족될 수 없으며, 현실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환상과 실재계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하는 중요한 개념이 대상a.

대상a는 타자의 결여를 대표한다. 결여되어 있는 특정 대상이라기보다는 결여 자체를 뜻한다. 욕망은 어떤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사라진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므로 상실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을 수반한다. 환상을 통하여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되는 착각을 지속시키고 자신의 균열을 외면하려 애쓴다. 대상a는 우리의 삶에 어떤 것이 결여되었거나 상실되었다는, 우리가 주체로서 가지게 되는 지속적인 느낌을 뜻한다[4].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메우려고 애쓰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은, 공백 또는 심연으로서의 실재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방식이다. 대상a는 공백이자 간극인 동시에 우리의 상징적 현실에서 그 간극을 순간적으로 메우게 되는 모든 대상이다. 이 때 대상a는 대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결여를 덮어 가리는 기능을 일컫는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상대방을 이상화하여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함을 느낀다. 이것이 사랑에 빠진 상태의 상상계적 차원이다. 나의 애인은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이것이 대상a. 대상a는 상징계를 구조화하는 공백, 간극, 결여인 동시에 그 결여를 덮어씌워 가리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a는 대상을 만드는 과정에 남겨진 잔여다. 그것은 교묘히 상징화의 수중에서 벗어나는 파편이다. 대상a는 실재계의 잔여다. 환상은 대상a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정의한다. 환상은 실재계가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 안으로 침입할 때 방어하는 역할[상징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3. 실재계와 주이상스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에 따르면, 인간의 일차적 동기는 쾌락 또는 욕망의 충족이지만(쾌락 원칙의 우선성), 쾌락 원칙에 상반되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주체들이 고통스러운 외상적 경험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임상적 사례들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생명의 일차적 목표가 죽음을 향한 적절한 길을 찾는 것이라고 제안했다[5]. 라캉은 이를 죽음에 의해 이끌리는 것으로 수정했다.

주이상스란 쾌락 원칙[6]을 넘어 잃어버린 대상인 사물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절대적 향유 의지를 말한다. 주이상스는 본래 성적 쾌락, 특히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 느끼는 즐거움을 말하는데, 라캉은 이 주의상스에 고통 속에서 누리는 쾌락, 불가능한 향유라는 의미를 추가한다. 주이상스가 향하는 잃어버린 대상은 상징계 너머, 즉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상징계의 주체에게는 접근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불가능한 대상이다. (=실재에 도달하려는 갈망, 욕망의 최종 귀결점.)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어떤 것을 놓쳤다는, 다른 어떤 것을 더 가질 수도 있었다는 느낌을 가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충분한 쾌락의 너머에서 우리를 만족시키고 채우게 될 그 이상의 어떤 것,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다.

 



[1] 사물이란? 그 자체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상징화 너머의 어떤 것, 단조로운 현실 속의 특별한 것(the thing in its dumb reality). 끝없이 찾아 헤매야 하는 상실된 대상. 가장 근본적인 인간 열정의 원인. 욕망의 원인(/대상), 사후적으로만(retrospectively) 구성될 수 있는 것,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만 어떤 것이 되는 것. 이후에 라캉은 이것을 대상a라는 개념으로 대체한다. 실재계와 관련해서 중요한 점은 사물이란 무(no-thing)이며 주체의 욕망을 통해서만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주체성과 상징계의 중심에 있는 공백과 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사물을 생성한다.

[2] 환상을 통해서 욕망하는 자신을 자각하며 욕망의 모습을 본다.

[3] 욕망은 환상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4] 욕망은 결여의 느낌인 동시에 결여하는 주체의 자각이기도 하다.

[5]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에 따르면 불쾌는 긴장의 생성으로부터 발생하고 쾌는 긴장의 소멸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므로 긴장의 소멸의 정점, 즉 쾌락의 정점이 죽음인 것이다. 일단 본질적인 이유로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맞이한다. 즉 다시 한 번 생명이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원칙이 예외 없이 진실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목표는 죽음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사실 이 생명이 없는 상태란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에 머물렀던 바로 그 상태가 아니던가. 불가사의한 자연의 함은 언젠가 때가 되면 생명체를 다시 무()라는 상태로 되돌려 보낸다. 나중에 생물이 특정한 단계에 이르러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도 이 불가사의한 자연의 힘에 기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 때 생명이 없던 존재 안에 발생한 긴장은 그 긴장을 없애기 위해 힘을 쓰게 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첫 번째 충동, 즉 무생물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충동이 탄생한 건 아닐까. 당시의 생명체는 원시적인상태라서 쉽게 죽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즉 이미 어린 생명체의 화학적 구조 안에 삶의 방향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므로 태초의 원시 생명체는 오랜 세월 동안 쉽게 탄생과 죽음을 반복해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외부적 충격이 가해지고 이를 견디고 살아남은 생명체가 원래의 모습보다 훨씬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자 생명체의 마지막 목표인 죽음에 이르는 길이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비록 죽음으로 향한 길은 더욱 복잡해졌지만 여전히 보존 본능에 충실하여 오늘날의 삶의 모습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보존 충동을 엄격히 따라간다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생명의 기원과 목표는 오직 죽음뿐이다.(《쾌락의 원리를 넘어서》 37-79)

[6] 라캉의 쾌락원리 = 주체를 상징계에 머물게 하면서 실재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상징계의 작용, 즉 언어적인 법칙

 

출처 : http://cafe.daum.net/bonavia/VNIG/9?q=%EC%A3%BC%EC%9D%B4%EC%83%81%EC%8A%A4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무의식은 의식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언어적 도움을 받아야 한다.(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생각조차 이미지가 아니라 말로 하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이 언어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왜곡이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압축과 전치라고 했고 라캉은 은유와 환유를 통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인식되었을 때 이미 그것은 본질과 다른 욕망으로 변질된 모습이니까, 무의식에 있는 우리의 욕망도 근원적으로는 실현불가능하며, 왜곡이나 증상을 통해서만 실현이 가능하다고 라캉은 말했다. 즉 왜곡이나 심리적=정신적 증상은 결국 영원히 상실된 대상의 대체물이라고 한다.

 

주이상스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프로이트의 욕망(drive)이 인간내부에서 시발된 육체의 심리적 대리자라면, 주이상스는 사회적 차원이 포함된 금지된 욕망이다. 무의식의 변질된 모습, '무의식에서의 욕망이 영원히 상실된 대상'의 대체물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배를 채우기 위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는 것’을 상상해 보자.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의 개인사정과 양육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아이가 울 때마다 젖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아이는 어떤 경우에 젖을 먹을 수 있는지, 어떤 경우는 주지 않았는지를 기억하고 이것이 학습되면서 젖을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자신과 상황을 조절하여 우는 법을 터득할 것이다.

 

즉 본인의 욕망이 엄마의 반응에 의해 변질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대타자=사회, 문화 등)의 욕망이다’고 표현했다. 즉 내가 원하는 그것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원하게 되어 진 것이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이 주이상스는 ‘‘불만족 속의 만족’( satisfaction in dissatisfaction), ‘고통 속의 기쁨’(pleasure in pain)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 주이상스, 박탈당한=금지당한 대상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인생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주체는 소외된다는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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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상스[ Jouissance ]


주이상스는 라캉의 조어 가운데 가장 번역이 분분한 용어이다. 지금까지 "희열," "향유," "즐김" 등으로 번역되었으나 모두 어느 한 면을 가리킬 뿐이다. 주이상스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 프로이트는 1920년에 발표한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인간에게는 쾌락을 넘어 죽음을 향한 갈망이 있고 그 죽음충동 때문에 강렬한 삶의 충동인 반복강박이 태어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1924년 「마조히즘의 경제원칙」(SE19: 159-170)에서 인간의 근원적 소망을 열반원칙으로 표현한다.즉 평화와 정지의 상태를 갈망하는 자아는 스스로를 파괴하여 흙으로 돌아가고픈 마조히즘의 충동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충동은 현실원칙의 요구라는 경제원칙에 따라 세 단계로 형태를 바꾼다. 근원적 마조히즘이 있고 여성적 마조히즘이 있고 도덕적 마조히즘이 있다. 가장 원초적 형태의 마조히즘은 정지, 열반이다. 여성적 마조히즘은 현실원칙으로 진입하기 전, 착각의 상태에서 동일시를 믿는 마조히즘이고, 도덕적 마조히즘은 현실로 들어와 초자아가 된 마조히즘이다.이것에 주이상스를 대입해보자. 근원적 마조히즘, 즉 만물이 정지하는 열반원칙이 주이상스이다. 그 다음 유아기의 여성적 마조히즘이 라캉이 강조하는 여성적 주이상스이다. 라캉은 영화 『감각의 제국』이, 이 단계의 주이상스를 보여주어 도착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그 다음이 잉여-주이상스라고 부르는 도덕적 마조히즘이다. 주이상스가 성적 희열, 혹은 즐김이 되는 것은 상징계의 억압이 일어난 후의 잉여-주이상스일 때이다. 만일 여성적 주이상스로 퇴행하면 『감각의 제국』이 보여주듯이 고통스런 자아파괴일 뿐이다.그러나 라캉은 이 단계를 뚜렷이 구분 짓지 않아 학자들마다 명칭을 조금씩 다르게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지오(Juan-David Nagio)는 근원적 주이상스 대신에 "대타자의 주이상스"를 쓰고, 밀러(Jacques-Alain Miller)는 기표화 되기 전, 기표의 순환구조에 들어간 후, 몇 단계의 주이상스로 나누어 패러다임을 만들기도 한다. 주이상스에 가장 가까운 프로이트의 단어는 리비도이다. 리비도를 번역하지 못하듯이 주이상스도 역시 번역을 거부하는 용어이다.(권택영)

 

참고문헌

• Freud, Sigmund. "The Economic Problem of Masochism(1924)." SEXIX. London: Hogarth Press, 1973.

•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맹정현 역,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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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상스 Jouissance 绝끊을 절시원할 상 오이디푸스가 죽고 안티고네가 테베로 돌아온 후, 두 오빠는 왕위 계승을 놓고 싸우다 죽는다. 그래서 왕이 된 외삼촌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만 허락하고 폴리네케스의 장례는 금지한다.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위반하고 장례를 치르다가 감옥에 갇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녀의 연인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도 자결한다. 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자결한다. 이처럼 안티고네가 왕명(王命)을 거역한 결과는 비극적 죽음이었다. 여기서 왕의 명령은 법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이름이며 죽은 자에 대한 경배는 신성성으로 상징되는 신의 이름이다.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이름인 법을 거부하는 것은 저항과 전복의 숨은 열망 때문이다. 이것을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명명한다. 라캉의 주이상스는 일반적인 쾌락이 아니라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를 넘어서고 언어상징도 넘어서는 전복(顚覆)의 충동이다. 향유, 향락, 희열의 의미를 포함하는 주이상스는 강렬한 쾌락이고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그런데 무의식에 잠재한 주이상스는 법과 제도를 파괴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금기를 깨고 싶어 한다. 여기서 주체분열이 생긴다. 즉, 말하는 요구와 원하는 욕망이 다르고 ‘나는 거짓말을 한다.’에서처럼 말의 주어와 행동의 주어가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 그런데도 주체는 이 분열로 인하여 생긴 결핍을 충족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위험하면서도 불온하게 아버지의 이름이자 대타자[big Other]인 법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잉여-주이상스가 있다. 사회의 법과 질서 속에서 허락되는 정도를 넘어서는 잉여-주이상스는, 주이상스 그 자체가 목표이다. 과잉된 힘이기 때문에 분출될 수밖에 없고 전복의 주이상스가 분출하면, 안티고네에서 보듯이, 아버지라는 이름의 법을 파괴한다. 이것은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의 역설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지나친 쾌락은 쾌락이 아니라 불쾌와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원래 모든 주체는 상징기호를 얻기 위하여 거세당한 존재이고 그래서 소외와 결핍이 생긴다. 이때 대타자로 등록하면서 내면에 숨겨둔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주이상스의 원천이다. 이 충동적 주이상스가 언어의 사슬인 상징기표와 법을 끊고 강렬한 파괴의 힘으로 작동하면 실재계에 도달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인간은 타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자기 내면의 소-타자를 억제하고 산다. 하지만 기호이고 상징이고 법인 대타자에 대해서는 복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잉여-주이상스가 없다면 대타자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고, 소-타자와의 관계를 적당하게 조절하면서 현실의 쾌락원칙에 맞추어 사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대하여 라캉은 세미나, <정신분석학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 – 1960)>에서 쾌락원리는 쾌락을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내면에는 그것을 깨트리려는 충동 즉 주이상스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쾌락원리를 넘어서는 순간 주체가 감당을 못하고 파괴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충동적이고 성적 쾌락원리인 주이상스는 죽음의 타나토스(tanatos)로 변화한다.

 

주이상스는 남근-주의적이지만 생물학적 남녀나 사회적 젠더와 다른 정신적 남녀로 구분된다. 그런데 사회질서를 인정하는 남성적이고 순응적인 주이상스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거부하는 여성적이고 보조적인 주이상스는 대타자를 전복하는 주이상스의 핵이다.

 

이 지점에서 생물학적 성을 넘어서 여러 형태의 성도착(Polymorphous pervert)이 일어나며 잉여-주이상스가 지나치게 강렬하게 작동하면 결국 파괴와 죽음에 이른다. 앞에서 예를 든 안티고네가 아버지의 이름, 법과 제도, 상징기호, 상징질서, 언어의 사슬을 파괴하고 감옥에 갇힌 것은 저항이고, 전복이며, 주이상스의 욕망윤리에 따른 결과다.

 

지젝(S. Zizek, 1949- )은 이런 라캉의 이론을 빌어 혁명적인 주체를 상정했는데, 그 혁명적 주체는 보편적 쾌락원리를 넘어서서 대담하고도 과감하게 대타자에게 도전하는 힘이다. (충북대교수 김승환)

 인문천문 목요학습 244 Thursday Study 星期四学习 2012년 7월 5일(목)*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참고문헌 *참조 <거울단계>, <상징적 거세>, <실재의 사막>, <욕망기계>, <죽음충동>, <쾌락주의의 역설>, <타자>, <대타자·소-타자>

[출처]주이상스 Jouissance 绝爽|작성자 황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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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kjoukim/5cHq/775?q=%EC%A3%BC%EC%9D%B4%EC%83%81%EC%8A%A4









10.욕망에서 주이상스로


 

욕망을 넘어서: 본환상과의 제대면

 

초기의 라캉은, 분석이 상징계를 거쳐서 성공적인 결말에 다다를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그에게는 욕망이란 곧 언어의 현상이고, 엄밀히 말해서 언어가 없이는 욕망이란 것도 없다는 것이 주된 생각이었다. 라캉은 욕망을 상징적인 언어의 기능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언어의 구조에서 비롯된 욕망의 자리바꿈의 방식에 관하여 상세히 논의했다.(『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논문 참조)

 

라캉은 분석가들은 분석주체의 의도하는 바가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문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 안에 깃든 기표(타자의 담화)를 가지고서만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라캉은 분석 과정이란 뒤엉켜버린 욕망의 매듭을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석의 목적이〈주체의 욕망의 형태들을 발현시키는 것〉이며, 분석의 성공적인 종결은〈결정된 욕망〉혹은〈한정된 욕망〉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결정된 욕망〉이라 함은 더 이상 타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거나 장애물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는 욕망을 말한다. 그것은 한때는 억압에 의해 무의식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억압에 종속되지 않는 욕망이며, 분석가의 요청에 대해서 거부할 수 있는 욕망이며, 따라서 타자가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욕망이다(물론 이는 오랜 분석을 거쳐 후에야 완성되는 것이다).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놔둬선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작업에 있어 욕망이 유토피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단계이다.

 

 

욕망의 주체에서 주이상스의 주체로

 

라캉의 후기 작업 속에서 초기 작업과는 달라진 것은 분석의 목표가 아니라 그 목표가 표현하는 방식이다. 분석의 목표는 여전히 타자로부터의 분리이다. 그것은 주체가 주위의 타자들이나 내면화된 타자의 가치 판단에 의해 영향받거나 금지당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욕망은 위반만을 추구할 뿐이다. 그런데 위반이라 함은 곧 욕망이 전적으로 법(타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욕망은 법의 금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자신을 타자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다. 욕망의 존재 자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그 타자이기 때문이다.

 

충동은 금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충동은 금지라는 말을 모르며 따라서 금지를 위반한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없다.

 

→처음에 라캉은 욕망에 삶의 기능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충동을 욕망과 구별하고, 욕망을 금지에 대한 부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욕망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질적인 것은 욕망이 아니라, 주이상스를 생산하는, 상실된 대상과 결부된 충동이 된다.

욕망의 본질은 바로 그것이 다다르게 되는 막다른 골목에 있다. 라캉에 따르면 욕망의 본질은 그 불가능성 속에서 발견된다. 욕망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동의 본질은 불가능성과는 무관하다. 충동에는 막다른 골목이란 것이 없다.

 

⇒한마디로, 라캉은 주체의 위치를 무의식적인 욕망에서 충동으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주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욕망의 끊임없는 환유 운동이 아니라 만족 그 자체이다. 라캉의 주체는 만족을 추구하는, 머리 없는 주체이다.

분석 이전, 주체를 지배하는 욕망은, 타자의 욕망, 가치, 이상을 함축하는, 타자의 담화를 통해서 언어적인 구조로 형성된 욕망이다. 그는 에고와 초자아에 의해 가능한 만큼 통제된 주체이다. 만약 초기의 라캉이라면 이러한 주체를 주이상스의 과도한 경험에 대해 방어하도록 위치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제 라캉은 이와 반대로 주체를 욕망이 아닌 충동에 위치시키며, (정신병자나 도착증자가 아닌) 신경증자에 대한 임상적인 분석의 목표 또한 분석주체의 욕망을 지탱하는 본환상을 변형시키는 것으로 상정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그가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주체는 타자의 요구나 욕망과의 관계가 아니라, 만족을 가져다줄 부분 대상인 대상 a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자리잡아야 한다.

 

충동의 단계적인 변형

요구/충동의 주체          욕망/충동의 주체          충동의 주체/대상 a

 

(1)요구의 주체, (2)욕망의 주체, (3)충동의 주체

첫 번째 단계에서 신경증자는 타자의 요구에 얽매인 채로 분석에 참여한다. 그는 분석가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때 분석가는 그것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분석주체에게 욕망의 공간을 열어주려 한다. 그 공간 속에서 분석주체는 타자의 욕망의 공간을 열어주려 한다. 그 공간 속에서 분석주체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종속 관계 속에서 욕망의 주체로서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다음으로 분석가는 대상 a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분석가의 욕망에 대해 분석주체가 나름대로 내리는 해석에 근거한 본환상을 뒤흔들어, 그것을 변형시키려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분석주체가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얼굴은 분석 과정을 통해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분석의 목표는 분석주체를, 이 상이한 세 개의 계기들을 통해서 충동의 주체로, 다시 말해서 실재계의 주체로 태어날 수 있게 인도하는 것이다.

 

 

에로스의 고양

 

라캉이 분석의 목표를〈충동과의 대면을 견뎌내는〉것으로 상정한다면, 분석에 성공한 주체란 무엇인가? 성공적인 분석이란 주체를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기계가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분석은 주체의 욕망이 그의 만족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분석이 목표로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분석주체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분석이 다다르는 지점은 분석주체가 충동과 만족을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다.

 

이렇게 허용된 만족은 프로이트와 전통적인 도덕의 관점에서 도착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동이 추구하는 것은 이성애(異性愛)적인 성기에 의한 생식적인 성욕이 아니라, 주이상스를 제공하는 부분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무의식적 욕망에서 혁명적인 특징을 발견했던 라캉은 이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이제 라캉이 추구하는 새로운 틀은 욕망과 충동이〈조화롭게〉자리잡는 구조이다.

 

 

욕망을 넘어서는 기술

 

라캉의 후기 관점에서 볼 때, 분석은 무의식적인 욕망을 해체하는 과정이 되는데, 왜냐하면 욕망은 분석주체가 대상 a와 관계 맺는 것을 방해하고 주체의 만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욕망은 만족에 대한 방어이고, 욕망하는 주체는 충동하는 주체에 대한 방어이다. 욕망은 충동의 주이상스를 간섭하고 방해한다.

 

라캉은 분석의 목표를, 타자의 욕망이라는 족쇄로부터 분석주체를 분리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욕망은 언어(기표), (언어에 기반한) 동일시, 해석 등과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반면, 주이상스는 동일시와 무관하게 언어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제 분석은 해석을 넘어서는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된다.

 

라캉에 따르면 분석은 끝없는 과정이 되어선 안 된다. 분석은 끊임없는 해석이라기보다는, 주체의 위치를 이동시키는 구체적인 운동과 함께 그 운동을 완성하는 종결점을 포함해야 한다. 여기에서 종결점이란 바로 라캉이 본환상을 횡단하는 것이라고 불렀던 지점이다.

 

정신분석은 통과를 통해서,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환상을 넘어 충동과 대면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가〈자신의 환상을 변형시키거나 파기한 후에 자신의 충동을 견뎌낼 수 있는지〉, 혹은 왜 분석이 분석주체를 이른바 통과하고 불리는 것으로 이끌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주이상스의 주체화

 

분석주체가 충동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라캉이 주체화라고 부른 과정이다. 주체화란 충동이 있던 자리에 주체가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은) 충동을 주체화하는 것은 그때까지는 거부되었던 충동의 중요성을 되찾아주고 그것에 합당한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게다가 충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이미 충동에 대한 표현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분석주체로 하여금 어떤 이유에서 성적 만족에 대해 상징적인 제약을 부과해는지 고민하도록 만들고, 이에 대한 주체 자신의 편견에 의문을 던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욕망의 주체는 충동의 만족에 대해 일종의 방어적인 태도로써 존재한다. 욕망의 주체는 주이상스(충동)가 아니라 욕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라캉의 방법은 그것이 일차적으로는 욕망을〈조작하거나〉〈방해하고〉, 심지어는 그것을〈교정하는〉것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만족과 욕망의 관계를 수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서 분석은 금지와 욕망의 주체를 충동과 주이상스의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제 분석은 분석주체의 욕망에 얽힌 매듭을 풀어 그가 자신의〈진정한 욕망〉을 스스럼없이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제 분석가가 풀어야 할 매듭은 분석주체의 주이상스에 얽힌 매듭, 다시 말해서 욕망과 주이상스 사이의 상관 관계 속에서 뒤얽혀 버린 매듭이다.

 

분석가는 현대 심리학이나 심리치료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다시 말해서 현실의 통제자라든가 재판관이라는 식의 역할을 포기해야 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모든 형태의 주인 담화를 포기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hybris/MqSF/62?q=%EC%A3%BC%EC%9D%B4%EC%83%81%EC%8A%A4&re=1







숀 호머 <라캉읽기> _ 라캉의 상징계와 주이상스


라캉 읽기

작가
숀 호머
출판
은행나무
발매
2006.11.10

리뷰보기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계 자체가 타자의 영역이므로,

상징계 안의 욕망은 타자가 지정해 주는 것에 대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라.

선호하는 직업, 선호하는 배우자 등등은 모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지정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욕망의 “주체는 타자의 장에 종속된 상태로서만 주체일 수 있다.” 

 

-네이버 케스트-

 

라캉 책 한권 읽은 내가, 것도 완전히 이해하면서 읽은 것도 아닌 내가

라캉의 이론을 적용해서 쓴 글이 아니 어설플 리 없다.

 

라캉을 처음 접한 건 4학년 비평의 이해 수업에서 였다. 사실 그 수업은 1,2학년들이 듣는 수업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 때 교수님이 특이한 분이셨다. 그 분이 특이한 인간이라기 보다는 그분이 하시는 비평이 기존 비평가들의 비평과는 많이 달랐다. 4학년 때 그 수업을 듣게 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학년 때 들었으면 절대 이해 못 했을 거 같다.

 

라캉은 언어로 대표되는 상징(시니피앙)의 세계를 상징계라고 했다.

사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배운다.

언어의 여러가지 특징 중 하나인 '자의성'에 대해.

언어의 자의성이랑 언어와 실제 그 사물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얼굴을 우리는 '얼굴' 이라고 부르고 미국애들은 '페이스(face)'라고 부르고 일본애들은 '카오()'라고 부른다. 우리가 얼굴을 얼굴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없다. 우리끼리 그렇게 부르자고 약속한 것이다. 어느날 '이제부터 얼굴을 '모미모미'라고 부르자'라고 우리끼리 약속한다면 그때부터는 모미모미라고 부르면 된다.

 

눈,코,입,귀가 있는 이 실제의 얼굴이 시니피에(의미)이고

'얼굴'이라는 언어는 시니피앙이다.

 

나도 머리로는 시니피에가 중요하지 시니피앙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상징계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는 시니피앙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난 지금 한달이 넘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때로는 살빼는 게 모라고 내가 이고생을 하고 있는지 한심하기도 하다. 그러나 살이 쪘을 때의 스트레스가 먹는 걸 참는 스트레스보다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떡볶이를 참으면서까지 다이어트를 한다. 바꿔서 말하면 살 빠지는 게 맛있는 걸 먹는 것 보다 만족스럽다.

정말 그럴까??

그게 정말 내 몸의 주인이자 내 정신의 주체인 '내'가 원하는 걸까?

살 찌면 뭐? 진짜 나한테 안 좋은 게 뭔데?

건강? 내가 고도비만도 아니고, 잘만 살아 왔고 잘만 살건데.

아름다움? 살 빠지면 아름다워진다는 게 진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이 살 빠진 몸매를 아름답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내가 살찐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면 그만 아닌가...

 

이제 문제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고 그것이 채워져야 만족을 느낀다.

주이상스가 없다.

 

“충동이 있는 실재계의 차원에 주체가 자리 잡아야 한다.” 즉 타자의 질서인 상징적 질서내지 문화의 질서 안에서 욕망을 길들이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교화되지 않는,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의 즐거움(주이상스)을 주체에게 찾아주는 것이 정신분석의 사명이 된다.

 

주이상스는 쉬운 말로 '최고의 쾌락'정도 인데,

이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에 나오는 쾌락이 극도에 오르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정말 주체인, 실제인 내가 진짜 내 욕망을 충족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랄까?

뭐, 내가 틀리게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

 

내가 살을 빼면 분면 쾌락이 있을 것이다. 좋겠지... 안 그렇겠어?

그런데 그게 진짜 쾌락이냔 말이다.

 

저기 씌여진 말대로 라면 나는 살을 빼서 상징계 안에서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살을 빼지 않아도 주체인 나를 아름답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걸 거다.

그런데 그게 쉽냐고...

난 이미 상징계 안에서 타인의 욕망에 쩔어서 살고 있는데...

 

그래도 노력은 해야겠지??

진짜 주이상스를 찾아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ave942&logNo=130141854741









실재, 주이상스, 승화

실재reel는 라깡 사상에서 가장 어렵고 모호한 부분이며 오해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개념이다. 실재는 1950년대 이후 상징계가 중요하게 부각될 때부터 상징계에 대립되는 막연한 어떤 것처럼 묘사되다가, [에크리]가 출판된 이후로 점차로 상징계보다 중요성이 커진 개념이다. 실재는 원래 헤겔을 비롯한 철학자들이 현실적인 어떤 것 혹은 가상적인 것과 대립되는 어떤 영역을 지시할 때 사용한 개념이다. 라깡은 실재를 프로이트가 심리적 현실이라 불렀던 것, 즉 성적 욕망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환상들과 결합시키면서 발전시킨다. 실재는 나중에 충동개념, 특히 죽음 충동과 결합되면서 주이상스가 향하는 상징계 너머의 절대적 영역으로 정의된다. 실재에 도달하는 것은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죽음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이것이 욕망의 최종 귀착점이라는게 특히 [칸트와 사드] [‘현실원리’를 넘어서] 등에서 논의 되고 있다. 실재는 욕망의 역동성에 대한 라깡의 답이자 정신분석이 목표로 삼는 진리의 상관물이기도 하다. 주체와 시니피앙의 관계가 안정적일 수 없다는 것은 실재계를 도입할 때 분명해진다. 1970년대 이후로 라깡은 쾌락원리를 뛰어 넘는 주이상스를 강조하면서 그것의 징후를 네 번째 보로메오 매듭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면서 주체를 엄습하는 유령같은 효과로 작용하는 실재계는 라깡 이론의 최후 대안이다.

실재란 무엇인가

실재계 역시 상상계, 상징계와 대립 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때 그 본래적 내용이 분명해진다. 라깡은 처음에 막연히 상상적인 것에 대립되는 어떤 것을 실재라고 불렀지만 언어와 연관 시켜 충동과 리비도 개념을 설명하면서 실재 개념을 상징계와 관련시켜 재정의 한다. 라깡에 의하면 실재계란 무엇보다 상징계가 주체의 의미 세계인 현실로부터 배제한 부분으로, 상징화를 벗어나는 모든 영역을 다 실재라 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환상, 주체 탄생 시 잃어버린 어떤 것, 언어적 질서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의 찌꺼기,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는 불가능한 성관계 등이 그것이다. 실재는 상징화에 저항하고 기표들의 질서에 동화되지 않는 모든 질서이다.

주체는 상징계만을 알기에 기표들의 질서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실재계가 상징계를 벗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할 수는 없는데 실재는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 실재란 어떻게 정체를 드러내는가? 실재는 상징계가 부과하는 기표적 질서에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상징화를 요구함으로써 상징계의 지배력에 균열을 가져온다. 라깡이 말한 “실재계가 쓰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상징계가 실재를 묘사하려는 순간 실재는 또 다시 사라지고 그렇게 사라지는 부정적 효과를 상상이나 상징화가 불가능한 것이라 묘사하면서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을 다음처럼 묘사한다.

우리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하려 한다. [......] 실재는 쾌락 원리에 대한 장애물 형태 로 나타난다.


실재는 쾌락원리를 벗어나면서도 그것에 대해 간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재는 반복의 근원이 되며, 상징계의 틈을 뚫고 나오는 낮선 대상의 형상으로 흔히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라깡이 실재에 대한 생각들을 [에크리]에서 자세하게 논의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생각과 정의는 여기저기 암시 되고 있다. 실재 개념을 통해 우리는 왜 라깡이 프로이트가 말년에 개념화 한 죽음충동을 그렇게 중시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실재에 대한 라깡의 생각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서 실재계가 어떻게 욕망의 귀착점이 되는지 살펴보자.

첫째, 실재는 상징계에 동화 돼지 않는 여분 혹은 상징화에 대한 저항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라깡은 부성 은유라는 개념을 통해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재정식화하면서 상징계를 인과적 차원에서 중시하지만 동시에 상징계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실재이다. 실재에 대해 정의할 때 우리는 ‘사후작용’ 의 논리를 적용해 볼 수 있는데 실재계란 언어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가 언어적인 것을 벗어나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의미는 언어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욕망을 끌어당기는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1959~1960년에 진행된 세미나Ⅶ, [정신분석의 윤리L’ethique de la psychanalyse]에서 라깡은 실재계가 잃어버린 대상의 모습으로 주체에게 다가오는 것을 물Ding이라 지칭하면서, 대상을 물의 지위에 고양시키는 작업을 승화라고 정의 한다. 이때 물은 실재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다.

실재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며, 주체가 도래하기 전에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시니피앙에 의해 구성되는 상징계는 자신이 표상하는 영역으로부터 이 실재를 배제하면서 현실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상징계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상징화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을 사유로부터 배제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여분은 주체에게 불안의 효과로 작용한다. 상징계 자체는 이 이종異種 구조이자 여분인 실재계의 배제 위에서만 유지된다. 그런데 주체는 상징계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실재계를 죽음의 효과로 경험한다.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언어는 사물의 살해, 즉 사물을 상징적인 기호로 대체시킴으로써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주체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물에 대한 직접적 접촉을 박탈당하는데, 대상을 마주 대할 때 항상 언어적인 규정과 상징이 사물 관계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실은 실재에 대한 열망을 부르는데 이것이 나중에 주이상스의 토대가 된다. 언어는 그렇기 때문에 주이상스의 원인이다.

둘째, 실체는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실은 성적인 현실이자 육체이기도 한데 상징계 질서에 의해 재편되고 질서가 부여되면서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된다. 아이의 탄생을 보면 자연적 육체를 가진 아이는 아직 주체라 할 수 없는데 상징계가 그에게 자리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대타자의 호명에 응하면서 원초적 욕구들과 자연적 신체를 시니피앙과 연쇄에 의해 대체하고 언어적 형태로 바꿀 때에만 존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억압을 낳기 마련인데 욕구와 요구는 언제나 어긋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충동의 대상이자 원천인 육체적 실재이다. 성적인 것은 상징계에 의해 질서 지어지면서도 동시에 상징화를 거부하는 주체의 신체와 이것에 연관된 찌꺼기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육체란 주체의 원초적 현실로서 주체에 대해 내부적이면서 동시에 상징계적 질서가 기입되고 외부와 소통하는 타자적인 질서이기도 하다. 육체는 시니피앙의 연쇄에 의해 주체의 토대로 상징화되면서도 자신 속에 늘 배제된 부분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배제된 것 혹은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때 실재는 환각적 형태로 상징계에 침투한다. 특히 라깡은 정신병의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환각이 억압된 것의 회귀와 관계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실재계의 예시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분석한 ‘ 늑대인간’ 의 사례에서 늑대인간이 본 잘린 손가락의 환상은 라깡에 의하면 실재계의 출몰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깡은 실재를 광기의 장소로 정의하기도 한다. 라깡은 [에크리] 곳곳에서 펀집증 환자 슈레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환각의 형태로 상징계에 침투하는 실재의 효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는 균열이 없는 충만한 것으로 절대적인 것이다. 상징계가 상징화에 수반되는 차이와 제한의 질서라면 실재는 무한함과 통합의 질서이다. 실재는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그런 것이다. 상징계는 이런 실재계에 변별적 질서를 도입하면서 의미의 세계를 건설하는데 그러면서 실재계에 구멍을 내게 된다. 상징계의 효과로 탄생한 주체는 본성상 의미화의 사슬을 벗어나는 실재에 다가갈 수 없는데 이러한 불가능성은 주체에게 금지, 즉 법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금지가 역설적으로 그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만들며 금지를 위반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금지이므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 이 불가능한 욕망을 주이상스라고 하며, 이것이 지향하는 대상이 바로 절대적 숭고함인 실재이다. 인간에게 대타자가 허용하는 질서인 언어적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하는 주이상스의 갈망은 그러기에 상징계의 이면인 죽음충동과 연관된다. 라깡에 의하면 금지를 넘어 숭고함의 절대적 경지에 도달해보고자 했던 것이 바로 사드가 도착적 욕망을 통해 무대화한 주이상스였다. 그러나 실재계는 사실상 주체에게 허용되지 않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실재는 언제나 애매함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으며 부정적 효과로만 간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영역이 된다.

라깡 자신이 [에크리]의 악명 높은 문체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전략적 목표도 바로 상징화와 시니피앙의 연쇄가 도달하지 못하는 실재를 텍스트의 틈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재는 불가능 하지만 절대적인 것이기에 언어적 착각에 잡히지 않으면서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애매하게 글쓰기 혹은 의미를 비틀면서 반쯤 말하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재의 존재는 주이상스를 욕망이 통과해야 할 최후의 관문처럼 제시하는 근거이다.


주이상스

라깡에 의해 정신분석 용어로 그 의미가 풍성해진 주이상스란 말은 원래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단어이다. 주이상스는 사전적으로 성적 대상에서 나오는 쾌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쾌락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며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주이상스는 또한 법적으로 일정 범위에서 소유를 노리는 용익권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법적 조치와도 연관된다. 그러나 주이상스는 단순히 법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라깡에 의하면 주이상스는 무엇보다도 쾌락원리 너머로 가보려는 전복적인 충동이다. 쾌락원리는 가급적 적게 향유하도록 한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지 않으면 쾌락은 불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이상스는 쾌락원리를 위반하여 그 너머로 가보려 하기에 본성상 파괴적이다. 쾌락원리를 넘을 때 주체를 기다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이다. 주이상스는 상징계의 너머를 지시하지만 실재와 마찬가지로 상징계와의 관계에서만 본래적인 파급력을 갖는다. 주이상스는 상징계의 속성인 반복 강박에 연관되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그 근저에는 실재가 있다. 주이상스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주이상스는 죽음 충동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쾌락원리, 즉 상징계가 부과한 법을 넘어서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인 물Ding을 되찾고자 하는 갈망이다. 물은 어머니의 자궁같은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상상적인 모든 표상과 상징적 질서를 뛰어 넘는 곳에 있는 순수 존재의 대명사이자 상실의 원형 같은 것으로 주체를 사로잡는 욕망의 이상을 말한다. 욕망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경험 세계가 아니라 실재계에 자리 잡은 물을 최종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욕망이 좇는 어떠한 대상도 물을 대신할 수 없고 물은 의미화의 모든 작용을 벗어나기에 욕망이 물을 지향하는 한 그 끝이 있을 수 없다.

주체가 물을 금지 속에 만난다는 것은 언어가 욕망의 대상을 정확하게 지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그 출발점에서 사물의 상징적 살해 위에서 구축되므로 주체는 말을 할 때마다 상실의 경험을 되풀이한다. 그런데 이것은 특정한 대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주체가 언어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만날 때 겪는 표상적인 거리감에서 비롯된다. 주체는 이 결여를 대상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데 이때 주체에게 환상 속에서 다가오는 알 수 없는 상실의 원형으로 가정되는 게 바로 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대상인 물은 죽음충동 속에서만 모습을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이상스는 죽음충동을 반복 속에서 경험한다. 주이상스는 쾌락원리 너머를 지시하는 반복과 연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이상스는 말하는 모든 주체에게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주이상스는 본성상 남성적일 수밖에 1970년대 이 후 라깡은 또 다른 주이상스인 여성적 주이상스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상징계의 법칙인 거세에 종속되지 않는 보충적 주이상스이며, 남근을 넘어서는 대타자의 주이상스이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거세의 보편성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언어적인 것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주이상스의 경험이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서 여성은 생물학적 입장과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설정되는 상징계 내의 여성적 위치를 말한다. 성차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1972~1973년에 진행된 세미나 [다시]에서 볼 수 있다.

주이상스는 결국 상징계에 의해 촉발되지만 실재에 의해 이끌리고 실재를 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재는 상징계 속에서 봉합되지 않는 틈처럼 부정적 효과로 메시지를 보낸다. 주체에게 보내는 실재의 메시지가 바로 증상이다. 라깡은 질병의 외부적 현상을 의미하는 증상이라는 용어에서 의학적인 색채를 배제하면서 이를 실재의 작용으로 정의한다. 프로이트의 증상 개념이 무의식의 지표로서 상징계적 기호에 훨씬 가깝다면, 라깡의 증상은 그 자체의 향유를 요구하는 실재계의 요구이다. 증상은 주체의 본성이며, 주체는 이를 향유하기에 치료를 통해 증상을 제거할 수 없다. 증상은 그 자체의 만족을 위해 승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에서 승화에 대한 라깡의 개념은 욕망의 윤리로 정식화된다.


승화

프로이트는 성적에너지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활동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것을 지칭해서 승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프로이트는 승화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활동과 예술 .문화의 향유 원천에 성적에너지의 역동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는 성적 충동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역동적 관점과 충동의 만족이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깔려 있다. 하지만 라깡은 성충동의 우회적 실현이라는 프로이트적 승화 개념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충동 개념의 내용을 개조한다. 라깡에 의하면 성적 충동은 육체적인 데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와의 관계에서 촉발되는 반작용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성적 충동에 대한 완전한 만족도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채울 수 없는 결여로서만 본래적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가정한 것처럼 성에너지의 완전한 승화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라깡은 승화를 본질상 성도착과 같은 것으로 보는데 둘 다 쾌락원리가 부여한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드 작품의 핵심 주체이기도 한 도착 행동은 사실 성적 쾌락에 탐닉하는 변태적 행동을 말하는게 아니다. 시드에게 도착이란 대타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 속에서 주이상스를 실현하기 위한 자신을 파괴하고 대상의 위치에 두는 희생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대타자의 절대적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사적 욕망은 포기되어야 한다. 라깡이 말하는 승화도 마찬가지이다. 승화란 대상을 물Ding의 지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것으로 이것은 근본적으로 물에 대한 갈망, 즉 주이상스의 한 형태인 것이다.

라깡에게 승화의 본질은 물에 대한 향유에서 찾아진다. 물은 쾌락원리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 자체에 언어적 주체가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체는 오로지 환상 속에서 대상들의 위치를 물까지 고양시키는 체험적 승화를 통해서만 물을 만나게 된다. 승화란 경험적 대상의 파괴와 새로운 창조를 낳으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예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예술의 기저에는 승화를 통해 대상들을 물이 실재에 의해 보장되는 대상이라면 욕망의 역동성도 실재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승화는 상징계적 구조에 종속된 주체가 그 태생의 한계를 넘어 실재를 향유하는 가능성을 열어주며, 욕망의 적극성에 대한 라깡 사유를 보여주는 중요한 후기개념이다.




*참고문헌 : [에크리] 라깡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 김석 : 자크 라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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