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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0줄서평 56 - 인물 07] 약산 김원봉 평전

두런두런 이야기/진담 혹은 농담

by 레제드라마 2018. 8. 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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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다.

- 약산 김원봉(1898 - 1958?) 평전

 

 

 

* 약산 김원봉 평전 / 김삼웅 지음 / 2008년 / 시대의 창

 

 

 

 

■ 김원봉에 대한 증언

 

 

• 의열단 활동했던 김성숙의 증언

김원봉의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 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득시키고 설득시켜 자기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것이 김원봉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

 

 

• 의열단 활동에 대한 염인호의 글

의열단의 활동으로 조선에서는 웃지 못할 사건까지 발생한곤 했다. 강도들이 재물을 재물을 빼앗으면서 “나는 의열단원인데 군자금으로 가져가니 그리 알아라”고 했던 사건이 있는가 하면, 충청도 어디에서는 경찰이 좀도둑을 잡아 경찰서에 앉혀 놨더니 이놈이 글쎄 “나는 의열단이다”하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자 순경들이 놀라 도망을 갔다는 얘기가 신문에 보도되었을 정도입니다. (염인호, 김원봉과 무정)

 

 

• 김원봉에 대한 일제 정보기관의 기록

보기에는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오안부적(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하여 신출귀몰한 특기를 가졌다.

 

 

• 아리랑 김산의 기억

김약산은 확실히 구별되는 두 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점잖고 친절했지만, 적에게는 지독히 잔인했다.

 

 

 

 

■ 약산 김원봉 어록

• 의열단원에게 한 연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한 강연

단지 이론만으로는 도저히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 이론 조직은 혁명운동에 있어서 수단일 뿐이고 직접혁명을 전취하는 것은 오직 무장이다.

 


• 민족혁명당 창당 연설에서

한국 혁명의 완성은 민족운동을 기본으로 해야하며, 해외보다 국내운동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내에서의 조직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국내의 청년층을 획득하여 그 조직의 핵심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수의 당원 청년들을 국내에 잠입시켜 농촌, 공장, 학교, 어장 등의 각처에 1군 1인씩의 배치를 목표로 해야한다.

 

 

• 1945년 12월 약산김원봉의 귀국인사

금후 정치는 인민을 행복스럽고 자유스럽게 하기에 힘을 쓸 것은 물론입니다. 오는 도중에 발을 벗고 남루한 의복을 입은 동포들을 보니 일본 침략정치 하에서 얼마나 신음하였는가 알 수 있었으며, 해외에서 자유스럽게 지내온 우리들은 오히려 편안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27년간 풍상을 다 겪으며 투쟁해오던 동지가 많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들이 환국하게 된것은 여러 가지 감회가 착종하여 목을 메이게 합니다.

 

 

• 정권을 인민에게 봉환하는 간수내각안을 제안하며

나는 당시 중경에 있는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임정 국무위원회를 열어 간수내각을 조각해 주권을 전국 인민대표 양해하에 처리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은 임정이 해외에 있어 국내 인민과 하등 연계가 없고 또 국내 인민들은 적의 압박 밑에서 혁명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 1945년 12월 8일 전국 농민조합 총연맹 결성대회 연설‘

오랫동안 압박 받은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한다. 인구의 절대다수인 농민을 위하여 모인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한다. 여러분의 토지 문제에 대해 나는 동의한다. 지금 우리의 투쟁대상은 일제가 아니라 일제의 대리인이다. 그들을 철저히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군인다. 그리고 우리의 군대는 농민의 군대이다. 여러분과 같이 오줌통도 지고 김도 매고, 씨도 뿌리겠다. 나는 일개의 군인으로 농민운동을 지지한다. 대표 여러분이 굳게 싸우기를 바란다.

 

 

•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대표 수락연설

새 조선을 건설할 의무는 우리의 우군인 미 소뿐아니라 우리들의 혁명전사와 이 만좌중에 모인 우리 민중에게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독선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엄격한 자기비판을 하여 과오를 범치말고 남북 일절을 규합하여 속히 임시 국회를 열어 강력한 우리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 김원봉의 이름과 경력

- 김약산, 최림, 진국빈, 이충, 김세량, 왕세덕, 암일, 왕석, 운봉, 김국빈, 진충, 김약삼

- 1898년 8월 13일생

- 의열단 단장(의백),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종혁명단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의정원 의원, 임시정부군무부장, 인민공화당 대표, 국가검열상(북한),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남 북 어디에서도 기억해주지 않는 비운의 혁명가. 조국과 민중을 위해 일생을 던졌지만, 그는 늘 앞에 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지울 수 없었다. 1920년대 의열단 단장, 1930년대 조선혁명학교 교장 겸 민족혁명당 당수,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간에는 조선의용대 총대장겸 광복군 부사령관,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대표, 인민공화당 당수, 북한정권 초대 국가검열상, 1958년 숙청인지 은퇴인지 종적을 감춘 혁명가..... 남과 북은 그를 밟고 섰고, 그의 이름을 철저히 지웠다.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그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약산 김원봉

 

 

청년 중년을 평생을 일제와 싸우고 조국에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한 인사는 그의 인물됨이 어떤 지 알 수 있다.

“오는 도중에 발을 벗고 남루한 의복을 입은 동포들을 보니 일본 침략정치 하에서 얼마나 신음하였는가 알 수 있었으며, 해외에서 자유스럽게 지내온 우리들은 오히려 편안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27년간 풍상을 다 겪으며 투쟁해오던 동지가 많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들이 환국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감회가 착종하여 목을 메이게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보인 운동가가 있었던가? 약산 김원봉은 해방이 되자 조국에 돌아가 정권을 인수할 환상에 젖어 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우리는 국내에 기반이 없고, 다른 많은 동지들이 있기에 우리 정부를 인민에게 봉환하자”는 간수내각안을 제출하였고, 서로 먼저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2진으로 쓸쓸히 군산공항에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해방된 조국은 친일파 형사들을 동원하여 잡아 고문하여 엄청난 충격과 굴욕을 안겨주었고, 늘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북한에 들어가 북한정권 창출에 기여했지만, 끝까지 사회주의 통일 보다는 중립화통일을 주장하다 결국 숙청(?) 되었다 한다.

 

 

내가 김원봉 선생을 안지 20년 동안, 늘 의열단,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자료를 찾아 볼 때 마다, 불철주야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자신을 바친 선생의 얼굴이 아른거른다. 독립기념관장이셨던 김삼웅 선생이 다시 김원봉 평전을 냈다고 해서 읽어 보았다. 마지막 부분에 러시아 시인 미야꼽스끼의 시를 실었다.

 

 

나는 원한다.

조국이 날 이해하게 되길

조국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냥 조국을 지나가는 수밖에

비스듬히 내리는 비처럼!

 

마지막으로, 그와 함께 했던 여성 혁명가 ‘박차정’을 기억한다. 조선의용대원으로 총상을 입고 신음하다 중경에서 돌아가신 김원봉 선생의 부인이었던 박차정. 김원봉 선생은 귀국할 때 박차정이 부상 당시 잆었던 ‘핏덩이가 말라 붙은 속적삼’을 가져와 친가 동생인 부산의 박문하에게 전해주었고,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하였다. 아, 잊혀진 여성혁명가 박차정 앞에 고개 숙인다

 

아, 박차정

 

 

그대는 어둡고 긴 침묵의 밤을 밝힌

민족의 작은 샛별,

모진 압제의 칼바람에 맞서

한 포기의 들꽃이어라

항일의 깃발 힘차게 펄럭이며

34년의 짧은 생애를

오롯이 국(國)의 제단 위에 바친 그대는

정녕 뜨거운 사랑이어라.

(최규창, 시인)

 

 

약삼 김원봉의 삶, 의열단에서 조선해방을 간부와 인력양성으로, 간부학교에서 군대 창설로, 그리고 연합운동으로. 해방후 민족국가 수립운동에서 조국통일운동으로, ㄴ제나 어우리민족의 살길을 늘 고민하고 시대의 문재제와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내고 실천한 진정한 혁명가 약산 김원봉 선생, 지금 그분이 살았다면 어떤 꿈을 갖고 계실까?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 고민해 본다

출처 : 석정과 승덕, 오늘도 너를 부르마
글쓴이 : 석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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