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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생성과 신라멸망

두런두런 이야기/진담 혹은 농담

by 레제드라마 2019. 4. 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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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대에 건국된 고려 (궁예의 죽음) , 점점 왕건에게 기우는 신라의 민심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09?category=786691 [라봉봉]


<경명왕대에 건국된 고려 (궁예의 죽음) ,

점점 왕건에게 기우는 신라의 민심>


신라 54대왕 경명왕 박승영

재위기간 7년 917~924년


경명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승영이며

신덕왕(신라 53대왕 신덕왕 박경휘) 의 태자입니다

(역시 박씨왕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의성왕후입니다


경명왕 원년(1년)

8월

경명왕의 아우 이찬(신라 2등벼슬) 위응을

상대등(신라 귀족 수장직) 으로 임명하고

대아찬(신라 5등벼슬) 유렴을 시중(오늘날 국무총리) 으로 임명했습니다


경명왕 2년

2월 봄

일길찬(신라 7등벼슬) 현승이 모반하다가 처형됬습니다


6월 여름

궁예의 부하들의 인심이 갑자기 변해서

태조(고려 태조 왕건)를 추대하자

궁예가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왕건의 부하들>왕건 장군 만세 !


태조(왕건) 가 즉위해서 연호를 새로 정하고

이 해를 원년으로 했습니다


<고려 1대왕 태조 왕건>우리는 천하대국 天下大國 이자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예,,

옛날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 高麗 라고 하겠다 !


<고려 백성들>아아 ! 고려 만세 !


,,


<신라 백성들>고려의 왕건이 그렇게 인품이 훌륭하다는데,,

우리도 고려로 갈까 ?? ,,


7월 가을

상주 尙州 (오늘날 경상북도 상주시) 의 도적 두목

아자개(성은 이씨이며 견훤의 아버지입니다) 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아아 !

견훤의 아버지가 내게 왔다는 것은

분명 고려에게 좋은 징조이다,,


짐은 아자개를 짐의 아버지처럼 모시겠노라 !


경명왕 3년

사천왕사 四天王寺 (문무왕때 나당전쟁

당시에 부처님의 힘으로 당을 물리치려 서라벌에 세워진 사찰)


소상 塑像 (조각상) 이 잡고 있던

활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에 그려진 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그 개가 짖는 것 같았습니다


(신라의 멸망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라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상대등 김성을 각찬 角湌 (=이벌찬 , 신라 1등벼슬)

시중 언옹을 사찬 沙湌 (신라 8등벼슬) 으로 삼았습니다


<김부식>우리 태조(왕건)가 송악군 松岳郡 (고려 왕조 500년 수도

개경으로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으로 도읍을 옮겼다


(굳이 태조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도 아니고

'우리 태조 [我太祖 아태조] ' 라고 나온 이유는

김부식님이 고려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권신이자 학자이자 신하였던 김부식이었기에

또 왕정국가인 당시에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은 시조이자 성인급의 인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후삼국 난세를 평정하고 고려를 건국한

한국사 위인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경명왕 4년

정월(1월) 봄

경명왕이 태조(왕건) 와 사신을 교환하고

수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경명왕>음,, 고려의 왕건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나온 자이지만

상당히 예의가 바르고 비범한 인물임이 느껴지는구나,,


<신라 신하들>그렇사옵니다

그의 백성들은 그를 마음으로 존경하며 따르고 있다고 하고

후백제의 잔학한 견훤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인물이옵니다


<경명왕>음,, (참으로 세상을 구할 위인이구나,,

그렇지만 결국 신라가 아닌 고려의 인물,,

우리 신라가 안전해야 할 것인데,,)


2월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장군 윤웅이

태조(왕건) 에게 항복했습니다


10월 겨울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 大耶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던

신라의 성) 을 공격해서 점령한 후

진례 進禮 (오늘날 충청남도 금산군) 로 진군했습니다


(결국 천혜의 요충지이자 삼국시대에도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이자

서라벌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대야성은 견훤의 3번째 공격만에

함락되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곧 후백제가 언제든지 마음놓고

서라벌을 공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 신하들>폐하 ! 대야성이 결국

견훤에게 함락되었사옵니다 !!!!!


<경명왕>어떻하노 ,, 어떻하노 ,,


<신라 신하들>오직 왕건밖에 없사옵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옵니다 !!


경명왕이 아찬(신라 6등벼슬) 김율을

태조(왕건) 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태조(왕건)가 장수에게 명해서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물러갔습니다


<고려군사들>백제야 물렀거라 ~

대고려국 만세 !


<신라인들>후백제군은 승냥이나 호랑이 같으나

늠름한 고려군은 마치 부모님같이 우리를 지켜주는구나,,


경명왕 5년

정월(1월) 봄

김율이 경명왕에게


<김율>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왕(태조 왕건) 이 저에게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소위 장륙 불상(장륙존상, 황룡사에 있던

초대형 불상) 과 9층탑(황룡사 9층목탑) 과

성대 聖帶 (성스러운 허리띠, 천사옥대라고도 불리며

옥황상제가 선녀를 보내 진평왕에게 준 허리띠)

가 그것이라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지금도 있는 줄 알거니와

성대가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라고 하므로

제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경명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경명왕>성대란 어떠한 보물인가 ?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 때 황룡사에 스님이 있었는데

나이 90세가 넘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황룡사 스님>그 보배로운 허리띠는

진평대왕이 사용하던 것인데

여러 대를 전해 내려 오면서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일찍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명왕이 즉시 창고를 열어 찾게 하였으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날을 정해서 치성(정성있게 기도) 을 드리고

제사를 지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되었고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은 맬 수가 없었습니다


<김부식>옛날 명당 明堂 (임금이 조회를 받던 정전 , 좋은 자리) 에 앉아서

나라를 이어받는 옥새를 쥐고

아홉개의 솥을 진열하여 놓는 것 ,

그것이 마치 제왕들의 대단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한퇴지가 평론하기를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태평성세의 기초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으니

세 가지 기물을 소중하다고 한 것은

과장된 자의 말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신라의 소위 세 가지 보물은 또한

사람이 만든 사치한 물건일 뿐이니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이들이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 ?


'맹자' 에는


'제후의 보배가 세 가지이니

곧 토지 , 백성 , 정치 '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초서' 에는


'초 나라에는 보물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고

오직 선 善 (착함) 을 보배로 삼는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선은

국내에서 실천하면

족히 한 나라를 선하게 할 것이며

국외로 실천하면

족히 천하에 은혜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니

이밖에 또 무엇을 보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태조는 신라 사람들의 전설을 듣고 물었을 뿐이며

그것을 숭상할만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사관으로 삼국사기를 기록했던 김부식님다운 평입니다)


2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태조(왕건) 의 장수 견권이

삭주 朔州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 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경덕왕이 기뻐해서

태조(왕건) 에게 사신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사례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한국사 위인답게

덕있고 영리한 인물이었으며

신라에게는 비록 자주국가 고려의 국왕이었으나

왕건 역시 신라 출신이기도 했고 신라의 길고 긴 사직에 대한

민심 역시 외면하지 않고

신라에 정성을 다한 외교정책을 펼쳤고

또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를 깍듯이 모시는 등

이에 신라 왕실과 민심은 더더욱 왕건에게

이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통, 역사에 대한 왕건의 존경과 존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견훤과 대비되기도 합니다)


4월 여름

서울(=수도, 서라벌) 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습니다


8월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습니다


경명왕 6년

정월(1월) 봄

하지성 下枝城 장군 원봉과

명주 溟州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 장군 순식이 태조(왕건) 에게 항복했습니다

태조(왕건) 가 그들의 귀순을 기념해서

원봉의 본 성(성씨)을 순주라 했으며

순식에게 왕씨 성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 달에 진보성 眞寶城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장군 홍술이 태조(왕건) 에게 항복했습니다


경명왕 7년

7월 가을

경명왕이 지성 旨城 장군 성달과

경산부 京山府 (오늘날 경상북도 성주군) 장군 양문

등에게 명령해서 태조에게 항복하게 했습니다


(인질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감을 알았던 경명왕과 신라인들로 보입니다)


경명왕이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 [재정경제부]) 시랑(차관급 벼슬) 김낙과

녹사 錄事 (절 담당관청 ??) 참군 叅軍 김유경을

후당 後唐 (당나라 멸망 후 중국 분열시기였던 5대 10국시대의 나라) 에

입조(외국 사신이 조정의 회의에 참여하던 일) 시키고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장종 莊宗 (후당 시조 장종) 이 정도에 따라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름 경명왕도 다시 중국과 교류하며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구현하려 한거 같으나 당대 중국도 혼란기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명왕 8년

정월(1월) 봄

후당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천주 泉州 (오늘날 경상남도 의령군) 절도사 節度使 (지방 장관) 왕봉규가

역시 후당에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습니다

(왕봉규는 오늘날 경상남도 의령군 지방 호족이었고

군소[작은 규모의] 지방 호족이면서도

그냥 신라 정부와 따로 외국과 교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무너진 신라여서 그냥 지방 호족들도

저마다 왕노릇을 하던 시대,, ] )


6월 여름

경명왕이 조산대부 朝散大夫 (문관벼슬 ??)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 [재정경제부]) 시랑(차관급 벼슬) 김악을

후당에 보내서 조공하니

(후당) 장종이 그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의 관직을 주었습니다


8월 가을

경명왕이 붕어(사망) 했습니다

시호를 경명 景明 (별 혹은 해 경 , 밝을 명) 이라 하고

황복사 黃福寺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낭산 동북쪽 기슭에 있었다고 합니다)

북쪽에 장사지냈습니다


태조(왕건) 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했습니다


<라봉봉>'민심을 얻는자가 천하를 얻는다' 는 말이 있듯이

점점 어질고 덕있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백성들의 마음이 모여가기 시작함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본다면

항상 건국 이래로 옛날부터 약소국으로 시작해서

백제, 고구려, 당나라 같이 강대국들에게 빌붙으며

조용히 힘을 기르다 백제, 고구려, 당나라를 물리쳤던

영리하다면 영리하고 한편으로는 영악했던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국의 천하를 얻었지만

결국 또다시 분열하며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고

쪼글아들었던 영토, 다시 약소국화 된 신라는

다시금 옛 조상들이 그랬듯이

왕건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하며 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패턴들이 반복되면

' 양치기 소년 동화 ' 같이

수가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 빌붙다가 힘키우고 뒤통수치기 ' 라는

신라의 패턴은 이미 전통과 역사를 중시한 태조 왕건 역시

' 궁예에게 빌붙다가 뒤통수 치기 ' 를 사용했기에

이미 영리한 태조 왕건에게 간파되었을 것이며

왕건 역시 신라를 정성껏 모시되

그냥 신라에 대한 호의적 도움이 아니라

신라를 도와줌으로서 신라인들의 민심들을 흡수해가며

옛날 신라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김유신 장군이 그랫듰이

삼국을 통일할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건국이래로 수많은 외세, 강국들의 위협에서

여러 전략과 동맹, 지혜롭고 냉정하게 대처하며 살아남았던

천년나라 신라였고 이번에도 고려와 동맹한 신라였지만

아마 신라인들도 당대에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진 나라에

어질고 현명한 왕건이라는 지도자의 등장 등

이번에는 진짜 멸망을 직감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09?category=786691 [라봉봉]





2

포석정에 침투해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강간한 견훤


신라 55대왕 경애왕 박위응

재위기간 8년 924~927년


경애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위응이며

경명왕의 동복(같은 어머니) 아우입다


경애왕 원년(1년)

9월

태조(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했습니다


10월 겨울

경애왕이 직접 신궁 神宮 (시조를 제사하던 성소) 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습니다


경애왕 2년

10월 겨울

고울부 高鬱府 (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장군

능문이 태조(왕건) 에게 투항(항복) 했습니다

태조(왕건)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울(=수도 , 서라벌) 과 가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 '적당히 먹기' 의 중요성을 아는 매너남 태조왕건이었습니다,,

괜히 동양에서 왕들이 즉위할때 짐짓 안하겠다는 시늉[연기] 를

했듯이 아무리 신라가 약했어도 오랜 전통의

발해를 제외하면 삼국을 통일한 정통성있는 한국 왕조였고

아무리 신라보다 힘이 강했어도

견훤같이 대놓고 오랜 역사의 신라를 위협하면

왕건 스스로에게도 독이 됬다 할 수 있습니다)


11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경애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왕건) 에게


<경애왕>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된다


고 말했습니다

태조(왕건) 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상당한 정치감각이 있었던 태조왕건 입니다)


경애왕 3년

4월 여름

(고려에 인질로 갔던 후백제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몹시 분하게 여김) 하여

군사를 동원해서

웅진 熊津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시) 까지 진군했습니다

태조(왕건)가 모든 성에 명령해서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서


<경애왕>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점점 후백제를 멀리하고 고려와 가까히 하려는

경애왕이고 이는 강자에게 붙고 힘을키우는 신라의

기본적 외교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인해 견훤도 신라에 화가 나게 된거 같습니다,,)


태조는 (신라)사신에게


<태조 왕건>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왕건의 견훤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발언으로

이미 고려 태조 왕건이 짜놓은 판으로

당대 후삼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분열된 시기의 난세의 영웅으로서는

삼국지의 중국 제갈량이 유명하지만

그는 삼국통일에는 실패한 인물이었고

그렇다고 삼국지 시기 당시

삼국통일을 주도했던 위,진나라의 조조나 사마의는 힘만 강했을 뿐

정당성이나 매력은 없는 나라였다 생각되고

하여튼 제갈량은 정당성은 있지만 삼국통일에 실패한 인물이라면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나 고려 태조 왕건같은 경우는

매력, 정당성 뿐만 아닌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만든 인물이라는 점에서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인물입니다)


경애왕 4년

정월(1월) 봄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경애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습니다


<후백제군>분하당께,,

아따 왕건이도 왕건이지만

항상 강자에게 붙어먹었던 신라놈들은 더 비겁하당게 !!


2월

병부(오늘날 국방부) 시랑(차관급 벼슬) 장분 등을

후당(중국 왕조) 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후당에서는 장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 副使 (부 , 보좌 사신)인 병부 낭중 郞中 박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

판관 判官 (절, 사찰 담당 벼슬 혹은 도움 관리) 인

창부 倉部 (오늘날 기획재정부 [재정경제부]) 원외랑 이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했습니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태조(왕건)가 직접 가서 근암성 近巖城 (오늘날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지역) 을 격파했습니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權知康州事

왕봉규(후삼국시대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던 지역 호족) 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습니다


4월 여름

지강주사 知康州事 왕봉규가 사자 임언을 후당에 보내서 조공했습니다

후당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습니다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관하의

돌산 突山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거나 순종함) 했습니다


9월 가을

견훤이 고울부 高鬱府 (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므로

경애왕이 태조(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해서

정병(강한 군사) 1만 명을 출동시켜서 구원하게 했습니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서

11월 겨울에 서울(=수도, 서라벌) 을 습격했습니다

이 때 경애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 鮑石亭 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적병(후백제군) 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후백제의 신라 수도 서라벌로 가는 관문인

대야성 함락 이후부터

이미 구멍이 뚫린 서라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애왕은 왕비와 함게 후궁 後宮 (별채) 으로 뛰어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습니다

적에게 붙잡힌 자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놀라고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노복 奴僕 (사내종, 노비)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후백제왕 견훤의 의도는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는

신라에 대한 보복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잔학했던 후백제군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서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경애왕을 찾게 했습니다


<견훤>하하하하하

신라의 왕궁도 별게 아니구나 !

수많은 백제왕들도 , 성왕도 , 의자왕도 못해냈던 일을

짐은 해냈도다 하하하하하


경애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별채) 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 갔습니다

견훤은 경애왕을 협박해서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 妃妾 (첩)들을 강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경애왕의 아우뻘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라 마지막왕이자 신라 56대왕) 경순왕입니다


<라봉봉>워낙 혼란스럽게 사망한 인물이라

시호를 '경애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도 없고

후대 경순왕에 의해 별, 햇빛 경 景 자에 슬플 애 哀 자가 붙어

경애왕 景哀王 으로 불리게 된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신라 말기에는

외국 군대에 의해 서라벌 왕궁이 점령되

왕이 피살당하고 왕비가 강간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이로인해 온 신라 백성들이 견훤을 두려워 하고

왕건에 더욱 깊게 의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석정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연회장소로

물길이 있어 그곳에 술을 흐르게 하고

흐르는 술위에 잔을 동동 띄어 연회를 했던

신라 사치와 향락의 결정체이자

경애왕이 피살당한 비극의 장소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박씨왕 신라 55대왕 경애왕 박위응으로

신라 박씨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고

이제 천년사직 신라 마지막 왕 신라 56대왕 경순왕 김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10?category=786691 [라봉봉]



3

경순왕대 태조 왕건의 고창전투 , 서라벌을 방문한 태조 왕건

천년왕조 千年王朝 신라 마지막왕이자 56대왕 경순왕 김부

재위기간 8년 927~935년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신라 46대왕 문성왕 김경응) 의 후손이며

이찬(신라 2등벼슬) 효종의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입니다


부(경순왕 김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추대라기 보다 경애왕을 죽인 견훤은

경애왕의 아우뻘 되는 사람인 김부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게했다 하고

어찌저찌 왕이 된 경순왕 김부입니다)


경순왕은 (견훤에게 죽은) 전 왕(경애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대청=마루, 혹은 서쪽 집)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습니다


<경순왕>천년왕조가 이대로 끝나버린단 말인가 !

ㅠㅠㅠㅠㅠ

(나도 언제 견훤이에게 죽을지 모르는데

그냥 왕건이한테 항복할까,,,,, )


<신라 신하들>ㅠㅠㅠㅠㅠ

(나도 언제 견훤이에게 죽을지 모르는데

그냥 왕건이한테 항복할까,,,,, )


시호를 올려 (전 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남산 南山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산)

해목령 蟹目嶺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 있는 고개) 에

장사지냈습니다

태조(고려 태조 왕건)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했습니다


경순왕 원년(1년)

11월

경순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했습니다.


12월

견훤이 대목군 大木郡 (오늘날 경상북도 칠곡군) 에 침입해서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한데에 수북이 쌓아 둔 곡식 더미) 를

모두 불태웠습니다


<신라인들>견훤이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구나 !!


경순왕 2년

정월(1월) 봄

고려 장수 김상이

초팔성 草八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5월 여름

강주 康州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했습니다


6월

지진이 있었습니다


8월 가을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서

양산 陽山 (오늘날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 命旨城 (오늘날 경기도 포천시) 의 장군

왕충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했습니다


견훤이 대야성 大耶城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서 대목군 大木郡 (오늘날 경상북도 칠곡군) 의

벼를 베어 갔습니다 (또다시 견훤의 대목군 침입,,)


<신라인들> ㅠㅠ


10월 겨울

견훤이 무곡성 武谷城 을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경순왕 3년

6월 여름

천축국 天竺國 (오늘날 인도) 의

삼장 三藏 (삼장[불경] 에 정통한 고승) 마후라 摩睺羅 가

고려에 왔습니다


7월 가을

견훤이 의성부성 義成府城 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순주 順州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했습니다

태조(왕건) 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습니다


(기세등등한 후백제군 등에 골치아픈 와중에

부하도 후백제로 이탈했으나

태조왕건은 애써 침착하게 다른 세력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용서한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겨울

견훤이 가은현 加恩縣 (오늘날 경상북도 문경시 기은읍) 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가은현은 견훤의 고향이었으나

자신의 고향 송악[개경,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 을

도읍으로 하고 튼튼하게 버틴 왕건과 달리

고향을 떠나 옛 백제지역에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결국 고향 함락에도 실패했다 할 수 있습니다)


경순왕 4년

정월(1월) 봄

재암성 載巖城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항복)했습니다

태조(왕건)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 尙父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그런 높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특별한 대우로 신하에게 내리던 존칭의 하나) 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 태조(왕건)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했습니다


(왕건은 주변 호족, 세력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처럼 항복해온 호족 세력들을 아버지처럼 모신다거나

호족 세력의 딸과 혼인을 맺는다거나 하는 등 방법을

매우 많이 사용했고 이런 포용, 융화적 모습은

잔인하게 경애왕을 살해한 견훤과 대조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만

둘다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라,,

하여튼 적당적당한게 좋아보입니다,,)


태조(왕건)는

고창군 古昌郡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 甁山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곳에서 짐과 고려군사들은

동쪽을 평안케 했도다 !

고로 이곳의 이름은 앞으로 안동 安東 (편안할 안 , 동쪽 동) 이라 이름 짓겠노라 !!


<고려군사들>와아아아 ! 고려 만세 !!!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지명의 유례)


(후삼국시대의 패자를 결정짓게 된 고창전투로

이로 인해 한때 후백제에 밀려 고심하던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에 대한 대승, 고려의 한국 동남부 진출 등

당대 후삼국의 절대적인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후백제군) 가 매우 많았습니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 永安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부근) ,

하곡 河曲 (오늘날 울산광역시) ,

직명 直明 (오늘날 경상북도 안동시 부근) ,

송생  松生 (오늘날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왕건)에게 투항(항복)했습니다


(경상도 일대를 다 먹어가는 왕건이고

결국 이 고창전투 이후 후백제는 위축되고

경상도 일대까지 전부 고려가 차지하게 되며

신라는 서라벌 수도 일대만 겨우 영향력을 미치는

옛날 신라시조 박혁거세, 혁거세 거서간 시대와

비슷한 서라벌 지역만을 다스리는

도시국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월

태조(왕건)가 사신을 보내와서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경순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9월 가을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마을)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했습니다


경순왕 5년

2월 봄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수도 , 서라벌) 근방에 와서 경순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습니다


경순왕은 백관(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 들과 함께

교외(도시의 주변 지역) 에서 (태조 왕건을) 영접해서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했습니다


임해전 臨海殿 (신라 경주 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 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경순왕이 말했습니다


<경순왕>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


경순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습니다


<경순왕>ㅠㅠ 


<태조 왕건>ㅠㅠ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경순왕이 혈성 穴城 (경상북도나 강화도쪽 같은데 왕궁과 가까운

경상북도쪽일거 같습니다) 까지 나가서

송별 (떠나는 사람을 이별하여 보냄) 하고

종제(사촌동생) 유렴을 볼모(인질)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수도, 서라벌)에 사는 남녀(혹은 귀부인들) 가 서로 기뻐하면서


<서라벌 남녀(혹은 귀부인)들>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호랑이나 승냥이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 王公 (왕건) 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구나 !!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호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이지만

옛날에 북한에서 미국을 욕할때

미제 승냥이 , 미국 승냥이 떼라고 욕하기도 했는데

개돼지라는 욕이나 승냥이 떼 같은 짐승이 들어간 표현 모두

삼국사기에서 실제로 한국인들의 조상이 쓰인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욕중에서도 뭔가 정감가는 ?? 말이 있다면

혹시 또 전통적으로 있었던 말일 수가 있는거 같습니다,,)


8월 가을

태조가 사신을 보내서

경순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 布帛 (베종류와 비단종류) 을 주었습니다


<라봉봉>그렇게 점점 한국은

왕건이 주도하는 질서로 움직여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영리한 전략가였던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이전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던

백제나 고구려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하되 신라를 서라벌 일대에만 고립시킴으로서

차츰 후삼국 시대를 통일할 준비를 해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11?category=786691 [라봉봉]




4

경순왕의 항복 신라의 멸망 , 라봉봉 한국역사 삼국 왕조편 끝


경순왕 6년

정월(1월) 봄

지진이 있었습니다


4월 여름

사신으로 집사시랑 執事侍郞 (집사부 수장직인 시중이

오늘날 국무총리였고 시랑은 차관급 벼슬이니

행정부 차관급 ??) 김불 ,

부사(부사신, 사신 보좌) 로

사빈경 司賓卿 (사신 접대업무부인 영객부 혹은 사빈부의 차관직)

이유를 후당(중국)에 보내 조공했습니다


경순왕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책봉 명령) 을 주었습니다


경순왕 8년

9월 가을

남극성 老人星 (남극성=노인성)이 나타났습니다


운주 運州 (오늘날 충청남도 홍성군) 경내(지역 안)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항복) 했습니다


경순왕 9년

10월 겨울

사방의 (신라) 국토가 모두

타인(왕건, 견훤 , 지방호족 등) 의 소유로 되어서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경순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왕건) 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습니다


<경순왕>우리 이제 끝났다 아이가,,

우리도 살려면 어쩔 수 없지만 왕건에게 가야한다 이기야,,


<신라 신하 1>비통하지만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저번같이 언제 견훤이가 또 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1. 견훤이에게 죽기 싫다,, 빨리 항복하자)


<신라 신하 2>그래도 천년사직을 함부로 내어줄 수는 없지만서도,,


( 2. 모르겠다 나는 중도)


<신라 신하 3>아니되옵니다 !!! 신라를 도적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사옵니다 !!!!!


( 3. 절대 안된다 항복 반대 !!)


여러 신하들이 의논했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때 왕자(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가


<마의태자>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忠臣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 하는 신하)

의사 義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 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豈宜以一千年社稷 개의이일천년사직)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


라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

신라조정의 신하들,,>우리 이미 끝난 나라고만

철이 없노,,


이에 경순왕은


<경순왕>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이도저도 아니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고

곧 시랑(차관급 벼슬) 김봉휴로 하여금

태조(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습니다


왕자(마의태자)는 통곡하면서

경순왕에게 하직(이별)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 皆骨山 (금강산 , 겨울의 금강산을 달리 이르는 말) 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의태자>나는 고려의 물과 곡식을 먹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고죽을지언정 평생을 신라인으로 살다 죽을것이다 !!!!!


그(마의태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습니다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먹으며 천년왕조 신라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하며

사망한 인물이기에 우리는 이 경순왕의 왕자를

'마의[삼베옷] 태자 麻衣太子 ' 라고 부릅니다


마의태자는 비록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발언을 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어서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 인물로 사랑받은 인물이고

특히나 태조 왕건의 고려 다음왕조였던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에서는

조선의 정당성을 위해

일단 전 정부인 고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야했고

이에 신라를 높이게 됬는데

특히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경순왕과 반대됬던

마의태자는 조선정부 입장에서는 더욱 옳게 보였다고 할 수 있고

또 성리학, 유교나라였던 조선에서 '사직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 는 것은

상당히 옳게 여겨졌기에 ,, 더더욱 마의태자를 높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대신 이런 정치적인 입장을 빼고 보더라도

오랜기간 , 무려 1000년을 이어갔던 신라왕조였는데

나라가 무너지자 모두가 살길을 찾아 왕건에게 가려 할 때

유일하게 신라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기에

그나마 마의태자 한명이 있어서

신라 천년왕조 멸망때가 덜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치만 또 현실적으로 봐도

이미 망한 나라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 보다

'있을때 잘했어야'  했던 신라 지배층이었습니다,,)


11월

태조(왕건)가 경순왕의 (항복)편지를 받고

대상 大相 (고려 7등 벼슬) 왕철 등을 보내서

경순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모든 벼슬아치)을 거느리고

서울(=수도 , 서라벌) 을 출발해서

태조(왕건)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서라벌 일대로 쪼글아든 나라가 된 신라였지만

1천년 사직의 나라였기에 서라벌[금성,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에서

송악[개경, 오늘날 경기도 개성시]으로 가는

항복행렬의 그 규모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아쉽고 침울하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고려시대]에 대한 기대감,

여러 생각들이 공존하며

상당한 진풍경이 연출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조(왕건)가 교외 (도시의 주변 지역) 에 나와서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태조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참고로 저 라봉봉은 언양김씨로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님의 후손이기도 한데

경순왕 김부와 낙랑공주 왕씨가 제 조상님이십니다 ㅎㅎ

즉 저는 신라 경순왕과 태조 왕건의 후손입니다 ㅎㅎ)


12월

경순왕을 정승공 正承公 으로 봉해서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 侍從 (모심, 섬김) 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했습니다

신라(서라벌)를 개칭해서

경주 慶州 (경사 경자로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慶州市 의 유례) 라 하고

이를 공(경순왕) 의 식읍(영지)으로 삼았습니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왕건)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했고

사자를 보내 경순왕에게 말하기를


<태조 왕건>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임금의 친족[혈연])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경순왕은


<경순왕>나의 백부 伯父 (큰아버지) 잡간(=잡찬, 신라 3등벼슬) 억렴이

지대야군사 知大耶郡事 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태조(왕건)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사람이 곧 현종(고려 8대왕 현종) 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경종 헌화대왕(고려 5대왕 경종) 때에 이르러

정승공(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경순왕)을 상보령 尙父令 (임금의 아버지같은 신하급, 특별대우) 으로

봉했습니다

공(경순왕)이 송나라 흥국 4년 무인에 죽으니

호를 경순 敬順 (공경할 경, 순할 순)


<김부식>효애 孝哀 (효도 효, 슬플 혹은 가엾을 애) 라고도 한다


이라 했습니다


(경순왕이 고려 항복후 받은 대우는

최고수준의 대우라 할 수 있고 그가받은 관작등은

김유신 장군이 신라에서 받은 대우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의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천년사직 신라를 함부로 뺏기도 뭐했는데

나라를 바치니 [비록 그것을 유도했을 지언정,,]

경순왕이 얼마나 이뻐보였겠습니까,,)


<김부식>신라 시조(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 부터

진덕왕(신라 28대왕 진덕여왕 김승만)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으로부터

혜공왕(마지막 태종 무열왕계 왕이라 할 수 있는 신라 36대왕 혜공왕 김건운) 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신라 37대왕 선덕왕 김양상)으로부터

경순왕(신라 56대왕이자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김부식>신라의 박씨(알에서나온 신라 1대왕 혁거세 거서간 박혁거세)와

석씨(신라 4대왕 탈해 이사금 석탈해)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신라 김씨 시조 김알지) 는 금궤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하강하였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금 金 = 김 金)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 연간에 우리 나라에서 상서 尙書 (고려 6부의 으뜸벼슬) 이자량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부식은 글 쓰는 임무를 맡아 보좌로 가게 되었다


우리(고려 사신)가 우신관 佑神館 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 놓은 것을 보았다

숙소에서 접대를 맡은 학사 學士 왕보가


<왕보>이는 귀국(고려)의 신 神 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 ?


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왕보>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곧 바다를 건너 진한(신라의 원형국가) 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 海東 (바다 동쪽 , 한국) 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영원히 선도산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화상(얼굴 그림) 이다


라고 하였다


나(김부식)는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이 지은

동신성모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


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 노릇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이제 다만 이러한 전설이 생긴 시초를 고찰해 본 것이다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히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예의차 방문) 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 子弟 (남의 아들의 높임말) 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황제를 모시는 일) 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성인과 현인)의 교화(가르침)를 받았기 때문에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신라는 중국 군사의 위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국운이 번창하고 태평한 시대) 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가(불교)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와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


이 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 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 擒虎 (호랑이 ??)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여화 張麗華 (중국 진나라 여자)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할 것이다


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국토를 송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 妃嬪 (왕비와 후궁들) 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고려 8대왕 현종) 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 陰德 (숨은 덕행) 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라봉봉>그렇게 삼국사기 신라 마지막 기록으로서

길고긴 대장정을 끝마쳤습니다

(이후 삼국사기 열전[왕이 아닌 귀족, 개인의 이야기]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 김부

그는 무력한 상황에서 어찌저찌 왕위에 올라서

결국 고려 태조왕건에게 항복함으로서

신라의 992년 역사가 끝나게 됬습니다

(농담이지만 8년만 더버텼으면 딱 천년인데 말입니다 ㅎㅎ,,)


신라의 최후는 그래도 왕건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온 덕에

다른 한국사 왕조들의 멸망보다는 덜 비극적이고

안전한 시대 계승차원의 멸망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한국 마지막 고대왕조 신라가 멸망하고

한국의 중세시대인 고려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아 !

대한민국 大韓民國 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세 대국 大國 의 이야기

고구려, 백제 , 신라 왕조 이야기를

저가 쓸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역사 블로거 라봉봉-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12?category=786691 [라봉봉]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12?category=786691 [라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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