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부산연극제 총평 / 김문홍
〚총평〛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난맥상을 보인 무대
제37회 부산연극제 경연작품 총평
연극평론가 김 문 홍
2019년 제37회 부산연극제부터 경연 부문 참가작의 요강이 바뀌었다. 제1회부터 2004년 제22회까지는 창작극이면 초연이든 재공연이든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부산지역 창작희곡의 활성화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2005년 제23회 부산연극제부터는 창작 초연 작품으로만 참가 자격을 한정했다.
창작초연 참가 제도는 득실이 많았다. 가시적인 성과를 두고 볼 때 득은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희곡이 활성화되었다는 점이고, 실은 창작초연이라는 한계로 작품의 완성도를 담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창작 초연으로 한정한 전후 상황을 살펴버면 다음과 같다.
① 제22회 부산연극제 경연부문 참가작들은 모두 8편으로 지난해보다 2편이 늘었지만, 극단 <맥>의 「세한도에 봄이 드니」(김문홍 작)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서울이나 기타 지역에서 몇 차례씩 공연됴ᅟᅬᆫ 작품이어서 참신함이 떨어졌다.
② 제23회(2005년) 부산연극제는 5개 극단만이 참가 신청을 냈다. 그 중에서 4작품은 부산 작가의 작품이고 한 작푼만이 서울지역 작가의 창작 초연이었다. 부산지역 작가의 작품 4편 중 3편은 창작 초연이었고 한 작품은 1년 이내에 공연한 작품이었다.
③ 제25회(2007년) 부산연극제의 경연 부문은 9개 극단이 참가하여 지난해의 6개 작품보다 3편이나 더 늘어 경연 부문의 열기를 더 했다....9개의 참가 작품 중에서 창작 초연은 극단 <부산레퍼토리시스템>의「삼매경」을 제외한 8개 작품으로, 이중에서 부산지역 극작가의 작품은 6개 작품이었다.
창작 초연 한정을 통한 가시작인 성과는 부산지역 극작가의 수가 이전에 비해 많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현재 희곡을 창작하는 극작가의 수는 희곡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 그리고 희곡 창작과 연출을 겸하는 작가를 포함하여 20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작가 수의 증가라는 득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담보할 수 없다는 실이 더 많았다. 그래서 2019년부터는 다시 2005년 이전으로 복귀하여 창작극의 완성도라는 숨통을 트이게 했다. 2019년 제37회 부산연극제 경연 부문은 모두 10개 작품인데, 창작 초연 작품이 5개 작품이고 재공연이 5개 작품이다. 그 중에서 부산지역 작가의 작품은 8편이고 타 지역 작가의 작품은 2개 작품이다. 단연 부산지역 작가와 창작 초연의 우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시 창작 초연의 작품 완성도, 연출의 작품 해석력과 독창적 문법, 공연장의 적합성이라는 문제를 드러냈다. 올해 부산연극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희곡이라는 텍스트와 이를 해석하고 무대화하는 컨텍스트(연출)에서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희곡 텍스트의 구조적 문제
희곡은 연극 3요소 중의 하나로 연극의 1차적 텍스트로 공연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희곡은 작가의 손에서 태어나는 순간은 문학성을 지니지만 그것이 무대화될 때에는 연극성으로 평가받는다. 텍스트가 완벽하면 연출의 독창적 문법이 미비해도 어느 정도의 연극성을 보장받지만, 텍스트가 허술할 때에는 연출의 독창성에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한다. 텍스트의 구조와 완성도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직조한 작가의 몫이기에 연출의 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번 연극제에서 극단 에저또의 「순이」(심상교, 김지은 작), 극단 배우창고의 「강석봉 베이커리」(박훈영 작), 극단 이야기의「노다지」(남혜진 극본), 극단 누리에의「여자 이발사」(김경미 극본, 강성우 각색), 극단 여정의「복녀씨 이야기」(김지슥 작), 극단 맥의「이녁 머리에선 향기가 나네」(유슈현 작) 등은 희곡 텍스트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주제의식을 향한 통일성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희곡에 있어서 줄거리 전개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과 사건은 반드시 주제를 향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주제와 관련이 없는 사건과 장면은 과감하게 생략해야 주제의식이 명료해진다. 왜냐하면 연극은 제한된 시간 내에 끝나야 하는 시간 예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여기에서 생략과 압축의 문제가 대두된다.
극단 에저또의「순이」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한 무당 굿, 순이 이웃 아주머니의 넉살, 아이를 위협하는 가면의 무리, 한국전쟁을 알리는 뉴스 릴 필름의 영상 등은 오히려 주제의식의 포커스를 흐리게 하는 장면들이다. 극단 배우창고의 「강석봉 베이커리」에서도 세탁소 주인 공달호, 부동산 중개인 홍순삼 등의 인물들이 펼치는 장면과 에피소드는 주제의식의 포커스를 오히려 산만하게 하는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극단 이야기의 「노다지」역시 전반부에서 이꽁보와 장덕팔을 제외한 금광 인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피력하는 장면은 쓸데없이 장황하다. 이러한 인부들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인 욕망의 밑바닥을 예리하게 드러내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사적인 내력과 신세 한탄을 하게 하는 장면은 주인물인 이꽁보와 장덕팔의 극적 행동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등장한다. 극단 누리에의「여자 이발사」에서도 생략해도 좋을 인물과 장면들이 산만하게 나열되어 오히려 주인물인 에이코의 인생 유전이라는 극적 행동을 약화시키고 있다. 극단 맥의「이녁 머리에선 향기가 나네」에서는 강림차사와 악단이 등장하는 바람에 입실댁, 장녀, 만석의 극적 행동에서 드러나는 효와 사랑의 섬세한 감정의 포커스가 흐릿해져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처럼 앞서 열거한 작품들은 주제의식을 향한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생략과 압축의 기교가 발휘되지 못해 주제의식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둘째, 희곡 구조의 평면성과 현실인식의 평범성이다.
극 연구집단 시나위의「귀가」는 플롯 구조의 평면성과 작위성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치매에 걸린 아내에게 기억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해 딸과 아들집을 차례로 방문하는 것이 서사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들과 부모의 화해를 위한 결말을 위해 마치 그러한 방문을 시도한 것 같은 작위성도 문제이다. 모든 갈등과 문제가 쉽게 해결되고, 인물의 극적 행동에 대한 필연적인 모티브가 결여되어 설득력이 약하다는 흠을 드러내고 있다. 극단 여정의「복녀씨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갈등과 문제가 쉽게 해결되어 마치 극의 모든 서사가 해피엔딩의 결말을 도출하기 위한 작위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현실의 민감한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현실인식에 대한 통찰력의 깊이가 약하다는 흠을 드러내고 있다.
연출의 무대 문법에 대한 자의성
희곡이 텍스트라면 연출의 작품 해석력에 의한 무대 문법은 컨텍스트이다. 연출은 문학으로서의 희곡에 연극성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종의 재단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학이라는 희곡이 지니고 있는 표층과 심층의 의미망을 잘 읽어내야 하는 극적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 인물의 대사 하나하나는 극작가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한 언어이며, 극적 상황과 제스츄어를 위한 하나하나의 지문 역시 주제라는 통일성을 위한 실핏줄에 해당된다.
연출자가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현실인식이다. 그런데 이번 부산연극제에 참가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연출자가 경연이라는 강박의식에 사로잡혀, 주제의식의 형상화보다는 연극의 스펙터클 구현에 쫓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첫째,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거나 살려내지 못한 점이다.
극단 더블 스테이지의「클로즈업」은 각각의 인물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차별화를 위한 전략에 집중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연출이 과도한 영상과 기교를 구사하는 데에 집중해 작품의 주제의식을 추구해야 할 목표를 상실하고 있다. 토곡 선생이 제자들에게 내린 호는 인간의 본성적인 욕망에 대한 일종의 스펙트럼이다. 그런데 연출은 절도, 교미, 화상, 화투, 변태라는 욕망의 차별화를 시도하지 못해, 5명의 제자들이 벌이는 욕망의 양상들이 변별성을 띄지 못하고 엇비슷하게 처리되고 있다. 공간의 바깥쪽에서 행해지는 클로즈업 영상이 변별성을 잃은 채 획일적으로 처리되고 있는 점이나, 극중 연출을 향한 이들의 욕망의 양태 역시 인물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는 무미건조함이 바로 그것이다.
극단 세진의「스트랜딩」역시 사회악에 의해 가족의 가치가 파괴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연출은 제대로 구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희곡의 평면적 구조라는 약점을 입체적으로 구조화시키지 못한 점, 극적 행동보다는 대사에 의한 설명, 인물의 극적 행동에 대한 필연적 모티브를 살려내지 못한 점, 과도한 영상의 사용으로 인물의 포커스를 약화시킨 점 등의 안이함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가족의 집단 자살을 고래의 영상과 긴밀하게 접목시키지 못한 채 정태적인 묘사만으로 안이하게 처리한 점은 결정적 흠으로 작용하고 있다.
극단 맥의「이녁 머리에선 향기가 나네」는 가부장적 가족 구조 속에서 가족 사이에 교환되는 효와 사랑의 감정과 연민이라는 주제에서 이탈하여, 삶과 죽음을 하나의 축제의 난장으로 바라보는 동양적 생사관으로 치환하고 있다. 즉, 작가의 주제의식을 연출자가 임의적으로 전복시키는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연출자의 극적 상상력과 통찰의 깊이를 인정한다 해도, 작가의 본래적 주제를 자의적으로 뒤바꾸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장면의 강약에 대한 묘수를 두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연출은 어느 장면에 포커스를 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감식안을 지녀야 한다. 주제와 관련 있는 장면과 에피소드는 탐조등을 비춰야 하고, 그렇지 못한 장면은 주제 구현을 위한 강약 조절을 시도해야 한다.
극단 동녘의「썬샤인의 전사들」(김은성 작, 최용혁 연출)은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한 완벽한 텍스트이다. 이 작품은 역사에 대한 작가의 부채의식과 참여라는 주제를 구현한 일종의 기록극에 가깝다. 이 작품은 러닝 타임이 전무후무한 200분인데, 장면의 강약과 이완을 위한 리듬과 템포에 소홀하고 있다. 또한 상자라는 오브제와 각 인물들의 수첩을 통한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시공간의 스며듦이 중요한 포인트인데 여기에 포커스를 두지 못하고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한승우 역의 성주원이 정확한 화술을 구사하지 못하고 맥을 짚지 못하는 어정쩡한 극적 행동의 결여는 결정적인 흠으로 작용하고 있다.
「강석봉 베이커리」에서 주인물인 강석봉의 극적 행동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주변 인물의 장면을 절제하고 통제하지 못한 점,「여자 이발사」에서 생략과 압축을 통해 주변 인물을 걷어내지 못해 주인물인 에이코의 인생 유전을 강조하지 못한 점,「이녁 머리에선 향기가 나네」에서 강림차사와 악단의 산만함을 통제하지 못한 점 등은 장면에 대한 강약 조절에 실패하고 있는 사례이다.
공연장의 구조적 문제
문화회관 중극장은 연극 전용 극장이 아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했지만 가시적인 구조물에만 공을 들였을 뿐, 무대 위 인물의 대사 전달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화회관 중극장은‘배우의 무덤’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등장하고 있다. 화술 훈련이 정확하게 몸에 배인 연기자를 제외하고는, 이곳 무대 위에 서는 연기자들의 대사는 그 전달력에 있어서 속수무책이다.
무선 마이크를 착용하거나 무대 바닥에 마이크를 매설하지 않는 한 객석까지의 대사 전달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경성대 콘서트홀이나 예노 소극장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희곡을 읽지 않아 극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관객들은 소리는 들려도 그 뜻을 모른 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배우들의 연기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잘 들리지도 않는 대사 속에서 러닝 타임 3시간 20분의「썬샤인의 전사들」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의 고통과 절망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연극 전용 극장이 시급하다. 대사 전달이 정확하게 이뤄지는 3,4백석 규모의 공연장 건설이 시급하다. 소수의 관객만을 위한 오페라 하우스 건설보다는 연극 전용 극장의 건설이 더 시급하다. 좋은 공연장이 없이 좋은 연극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산연극제 개선을 위한 전략적 로드맵이 시행되어야 한다.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꼬시래기 제 잘 뜯어먹는’공연을 지속할 것이 아니라, 관객을 연극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희망적인 부산연극제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철저한 희곡 심사로 참가 여부를 가린다든가, 성적이 부진한 극단의 참여를 유예시킨다든가, 아니면 부산연극제가 끝나는 순간부터 다시 다음 연극제를 준비하는 등의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제도를 백 날 바꿔보아야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연극을 만드는 주체인 연극인들의 발상의 전환이 없고서는 모든 것이 공염불에 불과하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바꾸지 않고서는 부산연극제의 미래적 전망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완벽한 희곡 텍스트, 연출자의 탁월한 작품 해석력과 극적 상상력, 공연장의 고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부산연극제의 발전이 요원하다는 것을 이번 제37회 부산연극제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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