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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덕담

두런두런 이야기/진담 혹은 농담

by 레제드라마 2020. 12. 2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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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덕담>

 

 

내 마음속에는 잊혀지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남아있다. 하얀 머리에 자그마한 체구이며 다른 분들과는 좀 다른 지적인 인품이 풍겨나던 분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든 분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꽃그림이 새겨진 예쁜 커피 잔에 마셨고, 햇살 바른 테라스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영자신문을 읽으셨다.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병실에 조용히 누워계시면 혹시? 하는 서늘함에 종종 병실에 들어가 살펴보기도 했다. 그때는 리모델링 전이어서 내가 일하는 곳과 병실이 함께 있었고, 할머니 병실이 내방과 마주보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시는지 할머니께서는 가끔 소리 없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책상위에 뭔가를 두고 가시곤 했다. 빵 한 조각, 포도 다섯 알, 요구르트 1병, 딱 한 번 먹을 분량으로. 고맙기도 하지만 할머니 간식을 빼앗는 것 같아서 안주셔도 된다고 해도 매번 두고 가셨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여기는 먹을 게 참 귀한 것 같더라. 다들 간호사실에나 챙겨주고 가지 여기는 아무도 안 챙겨준다 아이가? 맞제? 다들 즈그들만 먹고 안 주제? 아이가? 맞제?”

“아닙니더. 여기도 다 챙겨줍니다. 그러니까 어르신 많이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악담하나.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살으라고 그라노. 자꾸 살아서 우짜라꼬? 챙겨줄 때 묵어라 마.”

나는 할머니의 ‘묵어라 마’ 카리스마에 그냥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절할 수 없는 귀여움이 한 가득이다.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유쾌한 할머니지만 연세가 많다보니 종종 상태가 안 좋아져서 의료진이 총 충돌하고 모두가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행히 며칠 후면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시는 할머니였다. 그때마다 더디고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매번 스스로 걸어 다닐 만큼 회복이 되었다. 정신력이 여간 강한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나는 할머니 병실 문을 더 자주 열어보고 또 들여다보며 자꾸 살피게 되었다.

어느 날 할머니 친구 분이 옥수수를 삶아 오셨는지 내내 옥수수를 들고 다니며 드셨다. 그러다가 복도에서 나와 마주쳐서 인사를 하고 웃으며 지나가는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할머니께서 물고 계시던 옥수수를 반을 딱 쪼개셨다.

“옥수수가 방금 삶은기 되나서 참 맛나데이. 함 묵으보라꼬이.”

하면서 내미시길래,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저는 안 먹어도 됩니더. 어르신 많이 드세요.”

“바빠서 그렇제?”

하시더니 쪼갠 반쪽 중에 할머니께서 드시던 쪽은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반쪽의 옥수수알을 일일이 손으로 따셨다. 나는 웃으며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데 가노? 아나. 이래 하나하나 따 달라는 말이제? 자, 묵어봐라 맛나지.”

할머니는 일일이 따낸 옥수수알을 내 손에 덥석 안겨주시는 거다. 헉! 사실은 할머니손도 그렇지만, 특히 내손은 일을 하던 중이어서 정말 지저분한 상태였기에 그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눈 딱 감고 손에 그득한 옥수수 알갱이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옥수수의 구수한 맛과 더불어 짭조름한 맛이 입안 가득 감돌았다. 나는 최면을 걸었다.

‘나는 옥수수를 먹은 게 아니다. 할머니의 사랑을 먹은 거다.’

옥수수를 씹어 먹으며 할머니를 보고 웃었다. 할머니도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웃는 내 눈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눈물인지 신물인지.

그렇게 별 일 없이 지내던 할머니께서 지나가는 나를 불렀다.

“네?”

“잘 살아래이. 잘 살으라꼬.”

뜬금없이 덕담을 하시고는 며칠 지나지 않고 돌아가셨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여기서 1년 정도 지내면 저 세상 갈 줄 알고 살던 거 다 정리 하고 들어왔는데, 이래 오래 살고 있다, 벌써 몇 년째고. 징글징글하데이.”

이렇게 말하고 한 숨을 내쉬면서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셨던 분이었다. 나도 할머니와 정이 많이 들었는지 한동안 할머니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어느덧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덕담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덕담처럼 살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처럼 강인한 정신력으로 우아하고 지적인 노후를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이다.

요즘은 햇살 바른 테라스를 바라보면 다리를 꼬고 앉아서 꽃잔에 커피를 마시던 할머니가 보고 싶다. 어르신들이 없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가다보면 싸우고 웃고 시끌시끌하고 인간미 넘치던 그때의 복도가 그립기도 하다. 그렇게 나도 흐르는 시간이 아쉬운 세대가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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